브래지어를 입지 않은 지 오래됐다. 처음 엄마가 브래지어를 사다준 날은, 봉긋하게 솟아오른 젖가슴이 가려야 할 정도가 됐다는 게 괜히 뿌듯했던 것도 같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벗은 게 참 편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래도 두꺼운 옷을 입는 겨울에나 브래지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사시사철 브래지어를 입지 않은 건 이제 5~6년 됐는데, 여름이면 어깨가 구부정하게 움츠러들었다. 이제는 그 불편한 물건을 다시 걸치고 다닐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편해졌는데 딱 한 번 입은 적이 있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 무엇이 ‘위험물 등’인가</font></font>비정규직 투쟁 사업장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며 관련 기관에 항의 방문을 가는 날이었다. 충분한 대답을 듣기 전에는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연행이 될 수도 있겠다, 연행되면 경찰서에서 수사를 받게 될 텐데, 까지 생각이 미치자 신발을 다시 벗고 방으로 들어갔다. 서랍을 열고 아직 버리지 않은 브래지어를 보며 생각했다. 그걸 입지 않은 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억압’이라고 이해하는 나도,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형사에게 조사받는다는 사실에 신경이 쓰였다. 내가 자연스럽게 다시 어깨를 움츠릴 것이 빤히 예상됐다. 그래도 인권활동가인데 형사 앞에서 당당하게 가슴을 펴야지! 오랜만에 입고 나간 브래지어가 무색하게 그날 연행은 없었다.
입고 갔더라도 벗어야 했던 거야? 2008년 촛불집회에 참여한 여성 유치인의 ‘속옷 탈의’ 문제가 드러났을 때 나는, 어이가 없었다. 유치장에 갇혀본 몇 차례의 경험에서, 브래지어를 벗으라는 요구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 촛불집회 참가자를 겨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가 불거지자 경찰은 ‘피의자 유치 및 호송 규칙’에서 금지한 ‘위험물 등’에 브래지어가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자살이나 자해를 방지해 생명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경찰의 주장을 ‘이해’해 주었다. 그 결과가 얼마 전 ‘반값 등록금’ 집회에 참가했던 여성에 대한 브래지어 탈의 요구다. 경찰의 해명이 기막히다. 그 여학생이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등 돌출 행동을 보여” 브래지어를 스스로 벗도록 했다는 것이다. 아니, 여학생이 경찰서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데 경찰이 곁에 가서 했다는 얘기가 “브래지어 벗으실래요?”인가.
국가인권위원회는 당시 결정에서 “브래지어를 탈의한 후 성적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보완 조치를 강구”하라고 했다. 그래서 경찰은 그 여학생에게 겉에 걸칠 수 있는 옷도 구해줬다고 한다. 그들은 한 인간이 자신의 속옷을 입고 벗는 문제를 결정할 수 없게 된 상황을 보지 않고 한 여성이 브래지어를 벗은 상태가 되었다는 점만 주목한다. 여성이라면 브래지어를 입는 것이 마땅하다는 시선의 연속이다. 그러나 문제는 ‘벗으라는 요구’ 자체다. 그것은 성적 수치심만 낳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한다는 모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것은 속옷 탈의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이 경찰에 의해 연행되고 조사를 받고 유치장에 입감하게 되는 전 과정에 걸친 문제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 훼손되지 말아야 할 인간의 존엄</font></font>연행되는 순간 시작되는 인신의 구속은 불가피하게 인권을 제한한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이 본질적으로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이 바닥에 주저앉아 울면 달래면서 뭐가 억울하고 속상한지를 듣는 게 먼저다. 자살이나 자해를 방지하려고 ‘위험물 등’을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접근 자체가 문제다. 그런데 언론을 포함해서 어찌나 다들 브래지어에만 관심이 있으신지, 그렇게 좋으면 입고 다니시라고 얘기하고 싶을 정도다. 아니, 벗는 걸 좋아하는 거였지?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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