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젊은이들은 스스로를 ‘삼포세대’라고 부른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자조적인 선언이다. 비싼 대학 등록금과 아르바이트에 치여 시간도 돈도 없다. 허덕이는 그 과정을 유예하려고 휴학도 하고 군대도 간다. 학자금 대출의 빚더미 위에서 청춘의 정열과 낭만은 코웃음이 절로 나오는 소리이며, 지치고 초조한 마음으로 취직 준비와 구직난을 겪다 보면 연애는 나와 상관없는 먼 나라 일이다. 10년 만에 서울의 30대 미혼 인구는 두 배로 늘었다.
<font size="3"><font color="#991900">군 제대 뒤 만난 그녀</font></font>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싶은가’를 치열하게 고민하기보다는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를 시기마다 강요받는다. 그러나 포기라는 게 쉽게 받아들여지지만은 않는다. 괜찮은 기업에 취직만 하면 연애쯤은 가뿐히 건너뛰고 곧바로 결혼하겠노라, 연애 포기의 초라한 현재를 자위하며 도약(?)의 의지를 다지기도 한다. 그러나 남들 다 하는 스펙 몇 가지 얹어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한다 만다 하는 사이 어느새 서른이 코앞이다. 한꺼번에 세 가지를 모두 포기하는가, 아니면 처음에는 연애를, 그다음에는 결혼을, 어렵게 결혼하더라도 자식을 낳지 않겠다는 수순과 선택의 차이가 있을 뿐, 20~30대에게 ‘일포’ ‘이포’는 이미 드문 일이 아니다. 아마도 30대에 결혼의 기회를 잡기란, 또는 결심하기란 점점 쉽지 않아 보인다.
최대건씨는 10월에 결혼을 앞두고 있는 젊은이다. 32살의 그도 가진 게 없어 결혼을 꽤나 망설였다. 그가 일하는 경기도 수원 화성박물관에는 그의 예비 신부 김휘경(30)씨도 함께 나와 있었다. 다짜고짜 물었다.
<font color="#006699">일단 축하한다. 연애조차 어렵다는 시대에 결혼에 골인하는 30대 남자의 비결이 무엇인가.</font>
(웃음) 20살 때부터 내가 무척 어렵게 살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대학 때 처음 연극을 하면서부터 그랬던 것 같다. 결혼도 쉽지 않겠다 싶고, 그런 어려움을 이해할 만한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있었다. 군대에 다녀와서 이 녀석을 만났다(그는 예비 아내를 ‘이 녀석’이라고 불렀다). 어릴 때라 결혼을 생각하지 않았는데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여자친구는 결혼을 하고 싶어했지만 내가 가진 게 없어서 망설이고 작정 없이 미뤄만 왔다. 서른이 넘으니까 결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font color="#006699">가진 게 없는 형편이 좀 나아진 모양이다.</font>
그건 전혀 아니다. 무엇보다 혼자 사는 게 너무 힘들었다(이 대목에서 그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아주 절절해 보였다). 서른이 넘자 주변의 종용도 커졌다. 여자친구한테 양해를 구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이 녀석에게 되게 고맙다. 이대로 결혼을 대책 없이 미루면 헤어질 수도 있다는 여자친구의 얘기를 듣고 머리가 띵했다. 헤어진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고, 언젠가는 그냥 하겠지 하고 있었다. 같이 옆에 있는 게 당연했는데 여자친구를 참 많이 서운하게 했구나 하는 미안함이 들었다. 연애 초반에는 내가 가장 먼저 생각하고 가장 먼저 지켜줄 사람이 이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젠가부터 오히려 이 녀석이 내가 힘들 때 지켜줄 최후의 보루 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내놓을 게 없는 내 인생에서 최후의 보루마저 없어지면 안 된다는 절실함을 느꼈다.
<font color="#006699">이곳에서 하는 일은.</font>
공연 기획을 하는 곳에서 일한다. 기획사라고 하기는 뭐하고 일종의 예술단체 개념이다. ‘아리수’라는 여성 퓨전그룹의 공연을 맡고 있는데, 이곳 수원 화성박물관에서 1년 동안 정례 공연이 있다. 서양음악에 민요 발성을 섞어 노래하는 팀으로 남도·서도·경기 소리 전문가들이다. 각자의 분야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젊은 국악인들이 모여 개인 활동과 그룹 활동을 병행하는데, 우리나라의 세 가지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청소년을 위한 민요와 판소리, 소리극 등을 계획하고 있으며, 박물관의 특성에 맞게 정조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공연으로 만들어보려 한다. 6월 서울 광화문 공연에는 홍익대 인디밴드 ‘미나’와 함께하고, 7월에는 비보이와 비트박스 장단에 판소리가 어우러지는 시도가 계획돼 있다.
<font color="#006699">예비 신부는 어떤 사람인가.</font>
지금 보듯 무지 잘 웃는다. 밝은 사람이다. 처음에 웃는 모습이 좋아서 사귀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나를 잘 안다. 내 작은 몸짓이나 말 한마디로 이 녀석은 나를 다 안다고 생각한다. (“정말 다 알아”라고 휘경씨가 옆에서 말하자 곧바로) 사실 대부분 그 말이 맞다. 나는 스스로를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하는데 남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런 나와 어떻게 8년이나 사귀었나 싶고, 앞으로도 이런 친구는 없을 것 같다. 다른 배우자는 상상할 수도 없다. 소심한 성격으로 잘 삐치는 나를, 같이 있으면 10분 안에 웃게 한다. 물론 걱정이 다 사라지지는 않지만 나를 그렇게 대해주는 점이 좋다.
심리학박사 김정운 교수가 TV 프로그램 에서 말했다. “웃는 여자는 무조건 예쁘다.” 그래서 모든 남성이 예쁜 여자를 좋아함에도 예쁘지 않은 여자들이 다윈의 적자생존 법칙마저 뚫고 살아남는 것이라고. 여자친구의 가장 큰 매력을 주저 없이 잘 웃는 것이라고 꼽는 최대건씨 곁에 앉은 김휘경씨는 말수는 적었지만 정말 크게 잘 웃었다.
<font color="#006699">이른바 스펙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긴 연애를 유지해온 자신의 매력은 무엇인가.</font>
아마도 말발?(동시에 세 사람이 한바탕 웃은 뒤 휘경씨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사귈 때는 재미있어서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서른이 가까워지면서 자꾸만 어눌해졌다. 재미없어졌다고 여자친구한테 타박도 많이 듣는다. 그리고 내 꿈에 대해 여자친구가 드러내놓고 환호하지는 않지만 동의해주고 멋있게 생각한다. 이 녀석은 내 최후의 보루다. 주변에서 모두 ‘그런 게 될 리 없다’고 말할 때, 여자친구는 ‘좋은데’ ‘될 것 같은데’라고 말해준다. 가진 게 없는데 꿈조차 없었다면 여자친구가 나를 어떻게 봐줄지 장담하기 어렵다. 내 꿈 때문에 녀석이 나를 봐준다고 믿고 있고, 그래서 내 스스로가 좋고 지지해주는 여자친구가 좋다. 마지막 남은 내 긍정 같은 것이다. 신문에서 봤는데 남자들이 긍지 있는 표정을 지을 때 여자들이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 바보같이 고민하는 소심한 성격인데 앞으로는 긍지 있는 표정을 짓는 남자가 되고 싶다. 그래야 결혼 생활을 오래 할 수 있지 않을까. (웃음)
<font color="#006699">여자친구의 응원을 얻은 그 꿈이 궁금하다. 결혼 10주년 즈음에 준해 말해달라.</font>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구태의연한 곳일 수도 있고 예쁘기도 했지만, 어릴 때는 그냥 싫은 곳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어떻게든 떠나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통영 청소년들의 감수성은 대단하다. 열정은 있으나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내가 그랬다. 어린 친구들이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공연과 축제를 만들어가는 기쁨을 체험하게 하고 싶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일회적으로 찾아와 관광하고 해당 지역민들은 내내 일만 하는 식의 축제가 아니라, 지역 특성을 살리고 말 그대로 신명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축제의 바탕을 만들고자 한다. 그들이 커서 10~20년 뒤에 꾸준히 그 축제를 이어가도록 한다면 참 근사할 듯하다. 통영은 그럴 만한 곳이다. 결혼 10주년쯤에도 배고플 것 같은데, 함께해줄 사람과 결혼하는 나는 대단한 행운아다.
<font color="#006699">30대 남자는 결혼 생활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갖는지.</font>
혼자 밥 안 먹어도 되는구나, 집에 들어가면 불이 켜져 있겠구나 하는 별것 아닌 기대가 있다. 8년 연애와는 다른 설렘이 있지 않을까. 철없이 산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왜 철이 들어야 하나. 굳이 노력해서 철들고 싶지 않았는데 결혼을 하니 그 문제도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옆에 있는 이 녀석을 힘들게 할지 모르니까.
<font color="#006699">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들에게 조언을 한다면</font>
언젠가는 하겠지 하고 결혼을 미루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연애 기간이 좀 됐을 때 주변에서 결혼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상대에게 확신이 없는 건 아닌데 결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그 시기에 진지하게 고민했다면 모든 면에서 훨씬 수월하지 않았을까 싶다. 시간이 흘러도 상황이 좋아지기보다는 주변을 챙겨야 하거나 면구스럽고 불편한 면이 많아진다.
‘삼포세대’의 문제는 결국 돈이다. 그 문제를 국가가 부담하는가 개인이 책임지는가는 여기서 차치하자. 살아가는 데 경제력은 중요하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그렇듯 각도를 조금 달리해볼 수는 있다. 경제력을 제일 먼저 볼 것이 아니라 다른 점들, 예를 들어 성격, 친화력, 사회성, 상호 보완성 등 살펴볼 게 많다. 그런 것들을 본 뒤 경제력을 생각해본다면, 지금껏 보아온 다른 면들은 다 좋은데 경제력까지 있다면 금상첨화다. 또 다른 점들이 영 아니어서 경제력을 따지는 순서까지 갈 필요가 없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경제력 외의 것들은 별로지만 경제력이 있어 괜찮을 수도 있거나, 반대로 경제력이 없음에도 다른 점들이 경제적 무능력을 감수하게 할 수도 있다. 돈을 우선하면 가부만을 결정해야 하지만, 돈을 살피는 순서만 뒤로 놓아도 경우의 수가 많아지니 손해 보는 선택은 아니다. 장기 연애를 유지하고 결혼을 결정하면서 자의든 타의든 경제적 문제를 가장 나중에 둔 최대건·김휘경 커플은 현명한 사람들이다. 그런 현명함이 삭막한 시대에 꿈을 잃지 않은 남편과 스펙보다는 꿈을 지지하는 아내를 얻은 비결은 아니었을까.
<font size="3"><font color="#991900">사람 운이 좋은 사람 </font></font><font color="#006699">혹시 양가 부모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 기회를 빌려도 괜찮을 듯하다.</font>
지금보다 더 꼬질꼬질한 20대 시절부터 휘경이 부모님을 뵈었지만 이제껏 안부 전화 한 통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무엇보다 이 녀석이 내 곁에 있는 긴 시간 동안 다른 혼처를 종용하지 않으신 점 정말 감사하다(세 사람이 동시에 웃었다). 안정적이랄 수 없는 일을 하는데도 말없이 격려해주시는 것도 알고 있다. 내가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마다 자세한 설명을 드리는 성의를 보이지 못했는데도 양가 부모님들이 반대하신 적이 없다. 감사하다. 나는 정말 사람 운이 좋다.
수원=글 신수원 제1회 손바닥 문학상 당선자
사진 박승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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