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로 붐비는 지하철역 앞, 수많은 눈들이 스쳐간다. 나를 마주 보는 눈은 없다. 무수한 곁눈질만 있을 뿐이다. ‘흘낏’인지 ‘흘김’인지 ‘외면’인지 분간할 수 없는 눈빛들이 나를 훑는다. 쏟아지는 시선에 내 쪽에서 먼저 눈을 돌리기 일쑤다. 거리에 서는 일은 쉽지 않다. 소리를 내어 무언가를 팔아야 한다면 더 그렇다. 게다가 물건을 파는 이가 홈리스(노숙인)¹⁾라면 눈빛은 한층 차가워진다.
나는 서울 지하철 2호선 역삼역 앞에서 잡지를 파는 박종환씨의 옆에 섰다. 그는 말했다.
“첫날 잡지를 가지고 여기 홀로 서 있는데… 자리에 서 있기밖에 안 했는데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사기당해 망한 뒤 나선 노숙지난해 무더웠던 여름, 박종환씨는 역삼역 출구 앞에 섰다. 그의 손에는 ²⁾라는 잡지가 들려 있었다. 는 노숙인들의 자립을 지원하려고 발간된 잡지로, 노숙인이 직접 잡지를 판매해 그 수익금을 경제적 자립에 쓰도록 하고 있다.
그는 를 팔기 시작한 바로 그날, 자신이 ‘노숙인’임을 처음으로 밝혀야 했다. “노숙인들의 자활 잡지입니다”는 외침이 나오지 않았다. 자활 의지를 밝히는 것이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자신이 노숙인이라는 사실에 쏠릴 것이 분명했다. 가족에게도 비밀로 해온 일이었다. 입을 떼려 하자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자리를 벗어나 주변을 서성였다. 30여 분 뒤, 그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역삼역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멈추면 이제 정말 아무것도 못한다.’ 그 뒤 1년, 박종환씨는 이 거리의 ‘명물’이 되었다.
박종환씨의 노숙 생활은 2004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40대 중반이던 그는 한창 사업에 열을 올렸다. 기존 사업을 확장하고 웨딩홀 사업에 새로이 손을 댔는데, 그만 사기를 당했다. 한번 자금이 막히니 줄줄이 부도가 났다. 순간이었다. 압류가 들어오고 주민등록이 말소되고 억대 빚이 남겨졌다. 집 한 칸 구할 길 없어 가족들이 흩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살림살이를 맡겨둔 집에 화재가 났다. 말 그대로, 빈털터리가 됐다.
“많이들 죽었죠.”
박종환씨는 그때를 돌이키며 말한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여파가 끝나지 않은 시기였다. 경기는 불안했고, 사람들은 박종환씨처럼 거리로 떠밀려져 나왔다.
“차라리 전과자가 나았어요. 전과자는 교도소에 들어가면 밥이라도 주잖아요. 전과자가 되느냐 죽느냐, 두 가지 선택이었죠. 어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고 싶었어요. 내가 죽고 싶은 게 아니라, 머릿속 어딘가에서 시키는 것 같아요. 저기서 뛰어내리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고. 극단으로 가는 거죠. 누구도 그 심정 모릅니다. 그렇지만 죽는 것도 전과자가 되는 것도 쉽지 않았죠. 가족이 있으니까.”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어린 딸을 두고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돈은 결코 벌리지 않았다.
“직장을 구할 수 없어요. 주민등록이 없으니까. 건설 현장에 가면 경험도 없고 만만하니까 가장 밑바닥 잡일을 주는데, 이것마저 임금을 못 받기 일쑤고. 임금을 제대로 받는다고 해도 일주일에 한두 번 일 있다고 부르고 마니까 돈이 안 되는 거죠. 일자리 있다고 가보면 다단계 회사이거나 사기이고. 쳇바퀴 도는 생활이었어요.”
고시원 생활을 하다가 돈이 떨어지면 길에서 지내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배를 곯아도 교회나 봉사단체에서 하는 노숙인 무료 급식을 찾지 않았다. 공짜 밥에 적응되면 이곳 생활에 젖어들어 벗어나지 못할까 두려웠다. 거리의 삶은 무서운 것이었다. 한두 달 전에 보았을 때만 해도 멀쩡하던 노숙인이 어느 날 머리가 이상해져 역 계단에서 발견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그는 벗어나고 싶었다.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늘 같은 자리였다. 그러던 중 무가지 신문에서 ‘빅이슈 코리아’ 기사를 보았다. 자활 의지를 가진 노숙인을 찾고 있다고 했다.
“가서 상담을 받았어요. 상담받고도 열흘 넘게 고민했어요. 노숙인이라는 타이틀을 공개해야 하니까. 가족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해서. 자기 아빠가, 남편이 노숙인임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 그 기분이 어떻겠어요.”
가족마저 모르던 자신의 처지를 만천하에 드러내야 했다. 노숙인을 향한 온갖 편견과 냉소를 홀로 길에 서서 견뎌내야 하는 일이다.
“노점상이라도 하면 차라리 당당할 텐데…. 노숙인이라고 주변 노점상들도 저를 우습게 봤어요. 어떤 손님은 저랑 손 닿는 것도 싫어서 돈을 멀찍이 떨어뜨려 놓고 가고, 살 때도 제 쪽은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돌리며 사고.”
그럴수록 박종환씨는 더 열심히 했다. 쉬지 않았다. 하루 10시간 이상 가판을 지켰다. 역삼역을 지나는 직장인들 출근 시각보다 이른 아침 7시30분에 나오고, 야근을 마친 사람들이 집으로 향하는 밤 10시에 그도 짐을 챙겼다. 홍보를 위해 계속 소리를 내니 목에 상처가 났다. 의사가 목 쓰는 일을 자제하라고 권했지만, 그는 약을 먹으며 역삼역으로 나온다.
“하도 열심히 하니까 이제 사람들이 무시를 안 해요. 인정받은 거죠. ‘꾀죄죄하고 불쌍하니 팔아줄게’가 아니라 역삼역 빅판(‘빅이슈 잡지 판매자’의 준말)을 ‘열심히 해서 멋있어’라는 말을 듣고 싶어요. 실제로 ‘아저씨가 너무 열심히 사셔서 저도 힘을 받고 갑니다’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저도 힘을 얻죠. 매일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며 ‘당신들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존경한다. 나도 당신들을 보며 당신들처럼 되려고 한다’ 그러죠.”
이른 아침 걸음을 서두르며 박종환씨 앞을 스쳐가는 양복 차림의 회사원들, 불과 8년 전 그의 모습이다. 한번 ‘노숙인’이라는 딱지가 붙으니, 임시직 자리를 구하기도 막막했다. 일이 없고 돈이 없으니 거리로 내몰리게 되고, 다시 한 발짝 더 사회에서 멀어지는 악순환을 그는 기억한다.
“비웃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럼 저는 속으로 물어요. ‘당신 집을 몇 채나 가지고 있습니까? 나도 예전에는 몇 채의 집을 가지고 그 집에 대리석 바닥을 깔고 살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죠. 흔히들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동정으로 잡지 몇 권을 사주는 것으로는 해결이 안 돼요. 내가 더 깔끔해지고 당당해지니까, 처음 불쌍해서 사준 사람들은 오히려 이제 안 사가요. 동정은 거품이에요. 노숙인은 ‘동정’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사회에 ‘동참’시켜야 할 사람이라는 인식이 필요해요.”
노숙자에게 밥을 주고 돈을 주는 시혜가 아닌, 이들을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려는 실질적인 지원과 정책이 필요하다고 박종환씨는 열변을 토한다.³⁾
“내 현재가 고맙다”마침 어떤 여성이 그에게 음료를 건네며 잡지 한 권을 사간다. 그는 말한다.
“저분은 유일하게 저한테 밥을 같이 먹자고 해준 사람이에요.”
그제야 나는 누군가에게 돈이나 음식을 건네기는 쉬워도 같이 밥 먹는 것은 어려운 일임을 새삼 깨닫는다. 대상화된 동정과 동등한 관계맺음의 차이도. 그가 길에 나와 목청 높여 를 홍보하고 잡지를 파는 일은 동참을 호소하는 손 내밈이다. 박종환씨는 그 작업을 1년 가까이 해왔고, 그의 손을 잡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노숙인이 상가 주변에 있다는 사실에 적대적이던 상인들은 이제 그에게 선의를 보인다. 물을 건네고, 짐을 보관해주겠다고 자청한다. 역 앞에서 무가지 신문을 나눠주는 배달원은 가장 먼저 그에게 신문을 건넨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스쳐지나가지 않는다. 마주한다. 사람과 사람, 관계가 만들어지고 있다.
박종환씨는 먼저 웃고, 앞서 인사한다. 어려운 시절이 그에게 메마른 생채기를 내지 않았을까 했는데, 웃는 인상이 선하고 말랑하다. 길고 긴 시간을 견디며 상처와 모멸이라는 찌꺼기들은 걸러지고 남은 것은 하나의 후회뿐이다.
“사람들하고 더 깊이 교류할 것을… 그걸 후회해요. 열심히 살았어요. 내 가족을 바라보며 열심히 일했고, 더 벌려고 했고. 그런데 사는 것이 바빠서 주변을 많이 챙기진 못했어요. 내가 더 챙기고 교류했으면, 힘들었을 때 나에게 손 내밀어주는 사람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내가 해놓은 것이 없으니 원망할 수 없죠. 내가 먼저 손을 내밀려고 해요. 요즘은 작은 도움이라도 베풀게 되면 내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을 떠올려요. 당신들이 내게 도움을 주어서 나도 이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겁니다.”
그는 자신이 깨달은 바를 글로 써 잡지와 함께 건넨다. 사업체를 운영하는 대표에서 수중에 100원짜리 동전 한푼 없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위로 내달리다가 나락 밑바닥으로 떨어져봤다. 혹독한 경험 끝에 얻은 진실들을 적어 내려간다. 재능 기부로 만들어지는 빅이슈 잡지에 그 또한 자신의 방식으로 재능을 기부하고 있는 셈이다.
지하철역에서 쏟아져나오는 직장인들의 지치고 하얗게 질린 낯빛 속에서 박종환씨 홀로 검은 얼굴로 웃는다.
“아침에 여길 지나가면 다들 인상이 굳어 있거나 찡그러져 있어요. 먹고살기 힘드니까. 하지만 ‘내 현재가 고맙구나’ 그렇게 느꼈으면 좋겠어요. 나도 옛날에는 똑같았죠. 지금은 오히려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엄동설한에 서 있어도 나는 가족이 있다. 가족은 날 버리지 않았다. 나에게는 효녀 딸이 있다. 내 현재가 고맙다. 그렇게 생각하죠.”
박종환씨를 인터뷰하기 전, ‘빅이슈 코리아’로부터 인터뷰할 때의 주의사항을 들었다. 그중 하나가 ‘판매량을 묻지 말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당신 연봉이 얼마냐?’라고 묻는 일이 실례라는 걸 아는 사람들도 빅판에게 스스럼없이 판매량을 물어본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짧은 물음에 노숙인들의 잡지 판매를 정당한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편견이 담겨 있을지 모르는데도 말이다.
하루 판매 목표가 50부라며 밤이 늦도록 자리를 뜨지 않는 박종환씨는 말한다.
“다른 장소로 이동하면 더 많이 팔 자신이 있어요. 그런데 못 가죠. 나를 보고 잡지를 사가는 고객이 있으니까요.”
미래를 위해 묻어둔 자존심그는 잡지를 연구하고, 홍보 문구를 고민한다. 출간된 모든 빅이슈 잡지를 꼼꼼히 살핀다. 빅이슈 코리아 본사에 건의와 지적도 서슴지 않는다. 자신이 파는 잡지이기 때문이다. 판매량은 그의 미래와 직결된다. 그는 일을 하고 계획을 세우기에 미래를 가지고 있다. 그의 목표는 임대주택 마련이다. 가족이 한데 모여 지낼 집이 필요하다. 자금이 모이면 다시 사업을 하거나, 사회적 기업을 꾸려나갈 생각이다.
그는 성공을 해야 한다. 돈에 목표를 두는 성공이 아니다. 그는 사회에 다시 자기 자리를 잡아 당당히 재기하는, 그런 성공을 꿈꾼다.
“재기 의지는 있는데 벽에 막혀 길을 찾지 못하는 노숙인이 많아요.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성공을 해서 보여주고 싶어요. 가능하구나. 나도 사회로 다시 복귀할 수 있구나. 보여주고 싶어요.”
그는 오늘도 잡지를 팔려고 소리를 높인다.
“안녕하세요. 빅이슈는 노숙인의 자활을 지원하는 잡지입니다. 1991년 영국에서 창간돼 현재 10개국에서 발간되고 있습니다. 노숙인이 자활을 위해 직접 당당하게 잡지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더 알찬 내용을 담은 6월호가 나왔습니다.”
소리는 굵고 몸짓은 당당하다. 그는 이것을 “창피하지만 당당하게”라고 말한다. 그리고 되뇐다.
“나는 지금 자존심을 버린 것이 아니다. 다만 미래를 위해 묻어둔 것이다.”
글 희정 제2회 손바닥 문학상 당선자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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