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삶의 본질인 성장과 동일하며 교육 그 자체 이외에 다른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고 존 듀이는 말했다지만, 그 교육의 터전인 학교는 내게 ‘공포’였다. 그곳엔 ‘성장’보다 귀싸대기와 ‘빠따’가 난무했고, 수컷들의 비열한 서열의식과 이기적인 경쟁이라는 다른 ‘목적’이 즐비했다. 그곳은 차라리 슬픈 전쟁터였다. 1991년의 학교는 적어도 내게 그랬다. 더는 학교에 다니지 않기 때문일까. 지난 6월1일 찾은 경기 수원의 A고 교정은 평온했다. 초여름의 햇살은 평등하게 운동장에 내리쬐고 있었고, 아이들은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듯했다. 이 평온함은 이 학교가 사회로부터 ‘문제아’라고 배제당한 아이들을 한켠으로 보듬고 있는 곳이라는 데서 연유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특성화 공립대안학교로 불리는 수원 A고에는 100여명의 학생들이 꿈을 키우고 있다. 인문계나 전문계 등에서 학업성취도를 따라가기 어렵거나, 상대적으로 느슨한 규율을 원하는 아이들, 사회성이 부족해 일반 학교에 적응하기 어려운 아이들이 특성화 교과를 배우려고 이곳에 다닌다. 대개는 일반 학교에서 ‘상처’를 받은 아이들이다. 국어 교사 김부신(46)씨는 2008년 3월 이곳에 부임했다. 자원이었다. 일반 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힘이 들 이곳에 그녀는 왜 굳이 자원한 걸까? “평소 대안교육에 관심이 있었어요. 다양한 체험학습과 특성화 교과 등으로 이루어지는 교육과정이 마음에 들었죠. 맨발로 흙을 밟으며 시 한 편을 가르칠 수 있는 수업을 하고 싶었거든요.” 흙을 밟으며 하는 시 수업이라니. 말 그대로 대안교육인 셈이다. 이런 수업을 받는다면 시심이 없는 아이도 시인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사실 그녀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몇 번의 인터뷰 요청에도 그녀는 간곡하게 고사의 뜻을 전했다. 잘나지도, 특별하지도 않아 에 오히려 폐가 된다는 것. 그러나 아이들과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싶어 다들 가기 부담스러워하는 이곳에 자원했다는 것만으로 ‘만인보’에 그녀를 초대할 이유는 충분해 보였다.
집에 어떤 일이 있어도 교실에만 들어가면 다 까먹는다는 천생 선생이지만, 그녀의 원래 꿈이 교사였던 것은 아니다. 1983년의 사범대 진학은 오로지 ‘반값’ 등록금 때문이었다. “저희 집 형제가 8남매거든요. 형제들 키우느라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보니 미안했어요. 그래서 등록금이 반값(!)인 사범대에 들어갔죠.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고, 사실 기자가 되고 싶었어요.(웃음)” 당시만 해도 사범대를 졸업해서 교사가 안 되면 등록금을 국가에 돌려줘야 한다는 소문이 있었고, 착한 딸이었던 그녀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려 꿈을 접었다.
전두환 정권 초기의 대학은 문학을 좋아하던 생각 깊은 여대생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어려서부터부터 4·3 사건에 대해 귀동냥한 그녀는 과 선배의 소개로 사회과학 공부 모임에 참가하면서 ‘의식화’의 길을 걷게 된다. “대단한 문제의식은 없었어요. 다만 제가 사는 사회에 대해 알고 싶었어요.”
1987년 3월 인천의 한 여중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한 학기 만에 경기도로 발령이 난다. 홀로 지내는 객지 생활이 힘들어 언니가 있는 서울 도봉구에서 가까운 경기 북부로 전근을 희망했으나, 결과는 뜻밖에도 경기 남부의 한 공고였다. 수염이 거뭇한 사내아이들과 부대끼며 지역의 선생님들과 국어교과 모임을 함께 한 1987년 9월, 그녀는 자신의 삶을 지탱해줄 하나의 선택을 하게 된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전신인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에 가입한 것이다. “저를 의식화로 이끈 과 선배가 전교협 가입을 권유했죠. (웃음) 평소 선배에게 체벌 원칙이나 교육철학에 대해 많이 배운 까닭에 스스럼없이 하겠다고 했어요.” 의외로 대범한 그녀다. “당시는 전교조로 전환한 때가 아니어서 정부 탄압이 본격화하기 전이었지만 어느 정도 어려움은 있을 걸로 봤어요. 그래도 옳은 길인데 가야지 싶었죠.”
아이들이 ‘희망’이었던 삶탄압은 예상보다 가혹했다. 전교조 활동이 본격화되자 그녀도 교육당국과 정면 대립하는 상황까지 갔다. 전교조 합법화 운동이 가장 뜨거웠던 1989년에는 교장실에 불려가 경고장을 받기도 했다. 그런 어려운 상황을 버텨낸 데에는 “아이들이라는 든든한 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돌이킨다. “지금 생각해도 참 당돌했죠(웃음).” 그녀는 다행히 해직을 면했지만, 동료와 선후배가 학교에서 쫓겨나는 것을 봐야 했다. 떠난 자나 남은 자나 아픈 세월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아파할 수만은 없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 맑은 아이들이 있는 까닭이었다. 신영복 선생의 말처럼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었을까. “힘들수록 더 아이들에게 매달렸어요. 아이들이 제겐 ‘희망’이었으니까요. 아이들에게 더 다가가려고 애썼어요.” 고맙게도 아이들은 정부와 보수 언론이 만든 전교조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더 관심 갖고 사랑할수록 아이들은 더 뜨겁게 반응했다. 그런 아이들이 그 시절을 견디게 해준 힘이었다. 그녀는 그 시절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빛살 틔우며 살던 날들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학교마다 특별히 가슴에 남는 제자가 있지만, 아무래도 그때 아이들이 가장 기억이 많이 난다고도 했다.
“그중에서 가슴 아픈 일로 오랫동안 마음에 자리잡은 친구가 하나 있어요. 교직 4년차 되는 해에 만난 중학생이에요. 조숙하고 명랑한 성격에 정이 가는 아이였는데, 고등학교 진학 뒤 친구들과 사고쳐서 학교를 그만두게 됐다고 들었어요. 마음고생 많이 했을 텐데, 찾아가 손 한번 따뜻하게 잡아주지 못했어요. 게으르고 오지랖이 부족한 성정 때문에요.” 중학교 은사의 이런 마음을 그 소년은 알고 있었을까. “지난번 스승의 날 즈음에 연락이 왔어요. 제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죠. (웃음) 오래전에 같이 근무하던 교사를 우연히 만나 소식을 전해듣기는 했는데, 그 뒤로는 알 길이 없었거든요. 연락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얼마 전에 만났는데 훤칠한 외모에 자랑스러운 사회인이 돼 있더라고요.”
가슴에 남은 제자는 또 있다. “담임을 할 때인데,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고 작은아버지 댁에 얹혀 사는 아이였어요. 교실에서 막 소리를 지르고 싸우는 등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어요. 흔히 말하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성장애(ADHD)라고 볼 수 있었죠. 어떻게 하면 그 아이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한동안 그 아이를 거의 옆에 두고 살다시피 했는데, 집에도 데리고 가서 우리 애들과 같이 어울리게도 했죠. 그렇게 두 달이 지나니까 글도 배우려 하고 가만히 앉아 있기도 하는 거예요. 정말 기뻤죠. 사랑만이 아이들을 변화시킬 수 있구나 절감했어요.” 그 제자는 이후 공업고등학교 자동차과에 진학해 장학금을 받았다고 연락해왔고, 군입대 후 휴가를 나와 그녀를 찾아오기도 했다. 그녀는 이처럼 자신의 관심과 애정으로 아이들이 변화할 때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렇다고 힘들 때가 없지는 않을 터. “아이들과 저 사이에 소통의 벽이 높다고 느낄 때나 교사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한국 교육의 구조적 문제를 마주할 때 절망하죠.” 무엇보다 그녀를 슬프게 하는 것은 아이들과 선생님의 정서적 친밀감이 점점 줄어든다는 점이다. “처음 교사 생활을 시작한 20여 년 전에 비해 지금은 학생과의 정서적 유대가 훨씬 옅어진 것 같아요. 아이들과의 관계가 그저 지식을 주고 받는 정도라는 느낌이 들 때 씁쓸하죠.“ 일반 학교에서 더 이상 맺기 힘든 선생과 제자 사이의 끈끈한 정이 여기서는 가능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3년 전 그녀를 이곳으로 오게 했다.
‘무장된 사랑’이 일으켜세울 꿈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을까? “힘들 때는 많지만 후회한 적은 없어요. 누구라도 해야 할 일인데 제가 해서 잘해보자 싶은 마음이 있죠. 물론 음주·흡연·무단결석 등의 문제가 있어 교과 지도에 어려움도 많죠. 기숙사 없는 도시형 대안학교라서 집에서 다니다 보니 결석이 잦거든요.” 학교 도서관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차를 대접한다고 그녀가 돌아서자, 한켠에서 책을 읽던 여고생들이 외친다. “샘요~ 전 녹차요, 전 커피요~.” 선생이 말한다. ”민경(가명)아~ 커피는 없는데 그냥 녹차 마시면 안 될까?” 스스럼없이 차 심부름을 하는 선생님. 그녀와 제자의 ‘남다른 사이’를 엿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전교조의 탄생과 고난을 함께한 그녀는 현재 평조합원으로 남았다. 그녀에게 전교조는 생각하면 가슴 아픈 ‘친정’이다. 사실 그녀는 전교조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저어했다. 예전만큼 지금 열심히 활동하지 못한다는 자책 때문이다. 자신의 얘기가 행여 ‘후일담’으로 읽힐까 그녀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워했다. 여전히 열심히 싸우고 있는 이들에 대한 ‘예의’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말했다. 전교조는 자신에게 나침반이었다고. 길을 잃고 헤맬 때, 전교조가 있어 지나온 길을 반성하며 나아갈 길을 알 수 있었다고. “전교조에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사회의 시선이 있잖아요. 그 때문에 더 조심했던 거 같아요. 나 때문에 전교조가 욕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제게 교사로서 교육관이나 철학이 있다면 그건 전교조 활동을 통해 배운 것이니까요.”
25년 가까이 교직 생활을 해온 그녀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교직에 있는 동안 아이들과 즐겁고 행복하게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계획이에요. 해가 갈수록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절감하거든요. 아이들에게 종종 배우죠. 내가 많이 부족하구나. 더 배워야겠구나. 아이들이 제겐 스승인 셈이에요.(웃음)”
그녀의 마지막 말을 들으며 교육사상가 파울루 프레이리의 말이 떠올랐다. “무장된 사랑이 없다면, 쥐꼬리만 한 봉급과 교사들에 대한 홀대 등 정부의 멸시와 모든 부조리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녀를 지탱해준 것은 아이들에 대한 ‘무장된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그 사랑만이 쓰러진 아이들의 꿈을 일으켜세울 것이다. 그녀를 만나고 학교를 나서는 길, 이제야 교정이 평온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희망의 거처’가 된 학교가 거기에 있었다.
수원=글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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