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FM 라디오 의 DJ 로형철입니다. 지금 시각이 저녁 9시… 에, 20분 모자라는데요. 정말 길거리가 조용~해요. 청취자 여러분도 거실이나 호프집에서 맥주 한 잔 마시면서 라디오에 귀기울이시는 분이 많을 텐데요. 마치 월드컵 축구나 대통령 선거 결과를 기다리는 것 같은 이런 분위기… 아, 이거 좋아요. 저까지 두근두근하는데요. 도대체 뭘 기다리는 걸까요? 시사해설가 변해설씨를 만나 궁금증을 풀어볼까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요. 잠시 뒤 9시에 한국 최대 재벌, KK그룹의 고 정병중 회장의 상속자가 결정되는 거 아닙니까? 바로 로또 추첨을 통해서요.
3천만원의 사회 진출 자금P: 하하, 그렇게들 말씀하시는데, 정확히 말하면 고 정병중 회장 소유의 부동산과 여러 유산이 분할돼 새로운 주인을 만나게 되는 거죠. 우리 정부가 개헌을 통해 ‘혈연상속제’를 전면 금지하고, ‘세대상속제’ 혹은 ‘균등확률상속제’를 시행한 것이 9개월 정도 되었는데요. 사상 최고 금액이 오늘 밤 추첨대에 올라왔습니다.
R: 정말 예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 아닙니까?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은 사람에게 재산을 물려준다는 게?
P: 물론 여러 진통이 있었습니다. 상속제 폐지는 4~5년 전 노인층의 ‘상속 거부 운동’부터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는데요.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이 없는 자식에게 유산을 주느니 차라리 전 재산을 학교나 자선단체에 기증하자는 거였죠. 유산을 빨리 받으려고 살인 행각을 벌인 패륜 사건이 줄을 이은 것도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R: 아이고 나쁜 사람들. 부모들이 그 돈 버느라고 얼마나 고생하셨는데.
P: 그래도 이런 시도는 캠페인 정도에 머물렀습니다. 문제는 비슷한 시기에 대학생과 청년 실직자를 중심으로 한 ‘세대 전쟁’이 시작된 거죠. 이런 주장이었습니다. “단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기성세대가 땅과 일자리를 독차지하는 게 말이 되는가? 지금의 20대는 모든 기회를 원천봉쇄당했다. 다 같이 봉기해서 일자리와 집을 빼앗아내자.” 더불어 부유층 자제들에 대한 테러 행위들이 벌어집니다. 시중 5개 은행 전산망을 해킹해 수십만 명의 통장 잔고를 제로로 만들어버린 사건이 대표적이죠.
R: 저도 무서웠습니다. 코피 터지게 지방 행사를 뛰어서 번 돈 홀라당 날려먹을 뻔했으니까요. 그때 ‘자유경쟁당’이 혜성처럼 등장했죠.
P: 그렇습니다. 건국 이래 가장 혁신적인 정당 중 하나인데요. 주요 주장은 이랬죠.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완성된다. 능력 있고 열심히 일한 자가 부자가 되어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부모의 지위와 재산에 따라 자식의 삶이 결정되는 것은 ‘현대판 카스트제도’에 불과하다. 애초에 출발선이 다른데 어떻게 공정한 경쟁이 가능한가? 무엇보다 혈연에 의한 상속제도를 없애야 한다.”
R: 놀랍게도 자유경쟁당이 의회 다수를 점하고 개헌에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새로운 상속제도, 과연 어떤 거지요?
P: 누구든 죽게 되면 그 사람이 소유한 전 재산은 국가로 일시 귀속됩니다. 가족에게 장례 비용과 위로금이 지급되고 배우자와 미성년 자녀에게 법정 생계비가 주어지지만, 성인 자녀에게는 한 푼의 돈도 상속되지 않죠. 국가는 그 재산을 그해 19살이 되는 신입 성인들에게 재분배합니다. “한 세대가 죽어서 남긴 재산은 새로 어른으로 태어나는 세대에게 넘겨주자”는 것입니다.
R: 일명 ‘n분의 1 상속’! 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금액이 어느 정도 되죠?
P: 대통령 직속의 상속청에서 사망자의 은닉 재산을 철저히 파헤치고 있는데요. 결과적으로 매년 40만~50만 명의 신입 성인들에게 3천만원가량의 사회진출 자금을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학 등록금, 기술이나 자격 취득 자금, 창업 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 거죠.
유산 당첨을 원한다면 스티커를 모으세요R: 워낙 놀라운 조치라 부작용이 적지 않다고 들었는데요. 제 주변을 보면요. 자식에게도 못 주는데 그냥 ‘다 쓰고 죽자’고 말씀하시는 어르신이 많더라고요.
P: 상조회사나 생명보험회사가 노인 유흥회사로 변신하고 있죠. 남은 재산을 수명 안에 다 쓸 수 있게 재무 설계를 해주고 있고요. 부유층 중에는 전 재산을 현금으로 바꾼 뒤 초호화 유람선에서 죽을 때까지 쓰고, 남는 돈은 바다에 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재산을 무한정 축적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으니, 돈보다는 행복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자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습니다. 조기 퇴직으로 일자리를 넘겨주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고요.
R: 하하, 부모 재산에 기생하던 망나니 자식들은 혼쭐이 나겠는데요. 그래도 노부모가 깔고 앉은 재산이라도 있어야 자식이 거짓 효도라도 하지 않습니까?
P: 정부는 여러 후속 조치를 강구하고 있습니다. 일단 ‘효도월급제’가 있는데요. 불법 증여는 막으면서, 일정 점수 이상의 효도를 하면 그에 준하는 월급을 주는 거죠. 안부 전화에 5점, 직접 차린 상차림에 20점…. 물론 세무서에 증빙자료를 첨부해서 신고해야 합니다.
R: 괜찮은 투잡인데요? 직장에서 월급받고, 효도해서 월급받고… 아, 말씀드리는 순간 9시 정각이 되었습니다. 앞에서 죽은 분들의 재산은 젊은이들의 사회진출 자금으로 공평하게 분배된다고 하셨어요. 그렇다면 이 추첨은 뭔가요?
P: 재산 중에 곧바로 현금화할 수 없는 게 있잖아요. 부동산, 미술품, 골동품, 가구 같은 것 말입니다. 이것들의 처분을 두고 국회에서도 논란이 많았는데요. 자유경쟁당 내에서 뒤늦게 ‘전부 똑같이 나누는 건 공산주의나 다름없다’는 주장이 대두됐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지지하고 경쟁과 게임을 선호한다. 거기에는 일확천금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재산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추첨을 통해 나눠주게 된 거죠. 대신 조건은 있습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군 복무를 포함해 공익근무 4년 이상을 수행해야 기본 자격이 주어집니다. 아파트 청약과 비슷한데요. 공익근무를 계속하면 슈퍼마켓에서 주는 포도송이 스티커처럼 포인트를 받는데, 그게 많을수록 당첨 확률이 늘어나는 겁니다.
R: 그래서 요즘 공공근로와 봉사활동 붐이 일어나고 있군요. 그런데 돌아가신 분이 남긴 물건 중에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가치가 없지만, 가족에겐 소중한 기념품이 있잖아요. 그런 것도 추첨으로 나누게 됩니까?
P: 물론 아닙니다. 일기장이나 가족사진 같은 개인적인 기념품은 가족에게 그냥 넘겨주는데요. 이걸 악이용해서 일기장 겉표지를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초판본으로 싸서 만든다든지 하는 수법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R: 말씀드리는 순간, 당첨자가 한 명씩 발표되고 있습니다. 공개 추첨과 더불어 개인 휴대전화로 당첨 사실이 공지되는데요… 어라, 스튜디오 밖의 작가가 제 휴대전화를 흔드네요. 이봐, 나 당첨이야? 당첨? 아, 좀 비켜봐요. 아싸!
상속 물품 거부하면 과태료 물어P: 아, 설레발은 금물입니다. 상속 물품 중에는 부동산처럼 대박인 경우도 있지만… 20년 된 중고 자전거처럼 쓰레기에 불과한 것도 많으니까요. 로형철씨, 그만 소리 지르고 당첨 물품 번호를 상속청 사이트에서 확인해보세요.
R: 오케이! 좋았어! ‘한남8사-272호’. 뭐야, 빌딩이야? 자동차야?… 애견 치콜라? 이거 세상에서 가장 성질 더러운 개라고 TV에 나온 그놈이잖아. 이 개 때문에 정 회장이 화병으로 죽었다고! 나 이거 안 받을래.
P: 저런, 상속받은 물품은 5년 동안 무조건 보유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위반시에는 과태료와 함께 피상속 추첨권이 박탈당하죠. 안타깝지만 정 회장님의 유산을 잘 보살펴주셔야겠네요.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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