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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은 반칙이다(2)

등록 2011-05-10 17:29 수정 2020-05-02 04:26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갖은 사생활이 염탐당하는 지금에도, 고백 행위에는 잃(잊)어버린 과거의 것이 추억처럼 반짝인다. 이것을 조금 어렵게 말하면 ‘음성(청각)중심주의’인 셈인데, 다른 감각에 비해 청각은 음성이라는 비매개적 매개를 통해 상대의 진실이 직입(直入)한다는 상식, 혹은 편견이다. 물론 고백이 반드시 음성을 통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백’이라는 형식은 글자든 전자우편이든 심지어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든 음성적 직접성에 호소하는 듯한 착각을 준다. 예를 들어 다 아는 대로,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은 모르시지요?’라는 말은 이미 말이 아니라 그런 종류의 ‘형식’일 뿐이다.

고백, 형식의 지배-정치

어느 축구 선수가 시속 100km 이상을 달릴 수 있다고 해서 그를 축구계에서 퇴출할 수는 없을 게다. 설령 그가 인공심장을 달고 띤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공을 손으로 다룰 순 없다. 비록 그가 아무리 살짝, 혹은 아무리 느리게 잡더라도 말이다. 형식은 이런 식으로, 내용의 변화와는 다른 (넓은 뜻의) ‘정치적’ 동요를 일으킨다. ‘내용에 휘둘리지 말고 그 형식을 잘 살펴야 한다’는 취지의 격언들은, 이처럼 내용의 번란한-달콤한 풍경으로 그 정치성을 숨긴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사제에게, 환자가 의사에게, 그리고 학생이 선생에게 하는 사적 고백의 내용은 반드시 속죄와 치료와 교육에 이바지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우선 다양한 형식의 지배-정치인 것이다.

고백은 과거의 것, 무엇인가 전근대적인 아우라를 지녔지만, 앞서 말했듯이 오히려 바로 거기에 매력이 숨어 있다. 그것은 단지 대화의 실패나 공적 의사소통의 부재를 가리키지 않는다. 성장에서 음탕함의 계기를 빼놓을 수 없다는 지적과 마찬가지로, 무릇 욕망은 퇴폐적으로 흐르는 법이다. 갖은 문명의 제도와 심지어 사랑의 이데올로기가 세련된 완충을 제공해도 욕망은 과거를, 그 너머를, 그 너머의 어두운 곳으로 향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고백 속에 ‘더 깊고 중요하고 참된 것’이 있다고 믿는 태도는, 사랑을 고백하며 성기를 상상하는 일만큼이나 도착적이다.

외설적, 파괴적 상품

정작 문제는 우리 시대의 고백이 상업이 되고, 심지어 산업이 되었다는 데 있다. 자유와 평등을 위한 오랜 투쟁의 열매가 결국은 자본의 손바닥 안에서 마치 장남감인 듯 놀아나듯이, 신(神)과 스승과 연인을 호출하고 그들과 접속하게 해준다고 믿던 전래의 고백은 왕청뜨게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으로 변신해서 ‘괴뢰비전’(TV)과 출판가를 한순간에 주름잡게 되었다. 무엇인가 더 ‘깊고’ ‘중요하고’, 더구나 ‘참된’ 것을 발설하는 행위로 여겨지던 이것은 이제 무엇인가 더 ‘외설적이고’ ‘재미있고’, 더구나 ‘파괴적인’ 것으로 팔려나가는 것이다. TV의 토크쇼나 리얼리티쇼, 그리고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 등은 ‘고백(개인의 진실)의 판매’라는 코드에서 정확히 일치하는 행사들이다. 잊을 만하면 출판가를 횡행하는 회고담이나 사소설류의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고백(음성적 전달)의 전통적 특권성을 인정하든 말든, ‘고백 산업’의 발밭은 등장은 사람의 미소가 상품이라는 사실이며 아울러 그 영혼도 팔린다는 뜻이다.

김영민 철학자·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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