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만 노동자 총단결’을 외치던 1980년대가 있었다. 당시의 외침이 정의로운 이력이나 발판이 되어 유명해진 사람, 주류에 진입한 사람이 우리 사회에 적잖다. 그런 사람들 말고 이름 없이 그 시기를 메웠던 대다수 구성원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기성세대가 되었을 그들은 지금의 세상에 대해, 엄혹한 노동 현장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봉주영(47)씨는 1989년 서울 구로 지역의 한 전자업체에서 해고됐다. 내세울 것이 너무 없어 인터뷰를 할 수 없다는 그를, 지극히 평범한 이들의 삶과 생각을 들으려 한다고 수차례 설득해 만났다. 한가하다는 시간을 택해 갔는데도 아담하고 조용한 우유대리점 사무실에서 모니터 두 개를 살피고 연방 전화 통화를 하는 그는 꽤 바빠 보였다.
봉주영씨는 해고 뒤 한 번도 손에서 일을 놓은 적이 없다.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새벽에 우유 배달, 낮엔 요구르트를 배달하며 동네 세탁소, 24시간 슈퍼마켓 등 닥치는 대로 일을 찾아서 했다. 지난 3월30일 배달을 하려고 우유대리점 트럭에 오른 그가 밝게 웃고 있다.
=새벽에 우유를 배달하면서, 말하자면 바닥부터 익힌 일이니 그리 낯설지는 않다. 어쩌면 일을 손에서 놓아본 적이 없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얼결에 해고를 당하고 지난한 해고 싸움 이후 결혼을 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새벽에 우유 배달, 낮엔 요구르트를 배달하면서 동네 세탁소, 24시간 운영하는 슈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찾아서 했다. 짬을 내서 아르바이트를 겸하는 투잡도 했다.
-40∼50대 여성은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고 한다. 일이 있다고 해도 열악한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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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여자들이 늘 그렇지 않은가. 이제 젊지도 않고, 늙은 축에 속한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마땅한 일을 찾기가 쉽지는 않지만, 주변에 일하는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을 봐도 식당, 청소, 공장 등 죄다 그런 일들이다. 절대로 그런 일을 얕잡아보거나 부정적으로 본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쉽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구체적으로 말해달라.=요전에 경마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썩 내키는 곳은 아니지만 근무조건이 괜찮았다. 다들 서류를 접수하고 6개월 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기대하지 않았는데, 일주일 정도 지나 일을 하라는 연락이 왔다. 알고 보니 신청서 접수를 인터넷으로 하면 훨씬 빠르게 처리되는 구조였다. 다른 아줌마들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줬지만 대부분 직접 찾아가서 말로 접수하거나 서류를 작성했다. 홈페이지에서 신청서를 내려받아 간단히 빈칸을 채우고 클릭 몇 번 하면 되는 일을 겁을 내며 피했다. 컴퓨터 보급률이 높고 인터넷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 하는 게 아무 소용이 없는 게 40대 아줌마들의 현실이다. 사소한 정보처리에서도 뒤로 밀리니, 살림하면서 손에 익은 청소며 식당 일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요즘 식당에 가보면 반 이상이 중국 동포이거나 새터민 여성이다. 거기서
그들보다 얼마라도 더 받으려 경쟁하기도 한다.
-자녀를 컴퓨터 세대로 키운 당사자인 40∼50대 여성이 컴퓨터와 별개인 세대라는 사실이 놀랍다.=남편과 자식의 스마트폰 요금을 내주고, 자식의 컴퓨터를 최신형으로 바꿔 장만하고, 입학·졸업 때 노트북을 사주면서도 아줌마들은 그런 기기에서 제외돼 있다. 전자우편을 쓸 줄 모르는 건 흔하다. 그렇다고 컴퓨터를 끼고 사는 자식에게 앞에서 말한 서류 한 장 접수하는 것을 맘 놓고 부탁하지도 못한다. 그게 중년 여성의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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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언니가 있는 부산에서 잠깐 직장 생활을 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취직했다. 제법 규모가 있는 사업장이었고, 스스로 돈을 벌 수 있어 좋았다. 직장 생활만 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는데, 공단 근처에 풍물을 가르치는 곳이 있었다. 아버지가 고향에서 풍악놀이의 일인자였기에 새삼 반가웠다. 노동자의 생활이 비참하다고들 했지만, 그 말이 실감나지도 그다지 절실하게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느 날 출근한 그는 갑자기 부서 이동을 당했다. 영문을 알 수 없었고 혼자 부당한 처우에 대해 따질 용기도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풍물 배우던 곳에서 김근태씨 석방 강연회 초대장을 규모가 큰 노조마다 보냈고, 노총 대표로 텔레비전에까지 나오던 어용 위원장이 체면치레나 할 양으로 노조 간부 두어 명을 참석시켰다. 거기서 노조 간부가 그를 본 것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회사와 어용노조는 계열사 통폐합을 극비리에 합의하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외부 단체와 연결된 그의 존재를 회사 쪽과 어용노조가 가볍게 넘길 리 없었다. 1987년 구로연대투쟁 이후 사업장마다 삼엄하게 인사관리를 하는 분위기였다. 부서 이동과 심한 감시를 당했다. 내막을 몰랐던 그는 뒤에 닥칠 일을 전혀 모른 채 직장을 옮길 엄두를 못 내고 묵묵히 버텼다.
얼마 뒤 회사 쪽과 어용노조의 졸속 합의로 조합원 전원 정리해고가 강행됐다. 1989년 11월의 일이었다. 퇴근 때 갑자기 다음날부터 나오지 말라는 해고 통지서를 받던 날, 조합원 모두 퇴근을 거부했다. 저항은 예상외로 거셌다. 회사 쪽과 어용노조의 선입견은 견고해서 부당 해고에 항의하는 조합원들의 분노는 모두 그가 배후에서 사주하는 것이 되었다. “창피하지만, 구속이라는 말이 감옥에 가는 것인지 몰랐다”는 그는 구속됐다. 이미 피할 수도 물러설 자리도 없었다. 동료들과 정리해고에 맞서서 해볼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해 싸우다 보니 서른이 넘어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불이익이 많았던 것 같다. 회사를 관둘 생각은 없었는지.=근무 끝나고 풍물 몇 번 배우러 다닌 게 무슨 큰 죄라고 불려다니고, 고향에 가서 학적부까지 떼어 위압적으로 죄인 취급을 하는 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부당하게 라인 이동을 당하고 눈총을 받고 하면서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직장을 옮기는 게 쉬운 일도 아니었고. 그때는 어렸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한 내가 오히려 구속까지 될 줄은 생각 못했다. 순진했다. 겁은 났지만 너무 억울했기 때문에 피해서 내 발로 나오고 싶지는 않았다. 나를 둘러싸고 회사 내에서 그렇게 큰일이 벌어지는 전말을 전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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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의 어느 지점에서 함께 부당함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어도, 어떤 이에게는 그때의 아픔과 경험이 정의롭고 떳떳한 인생의 경력이 되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상처이며 그저 전과뿐일 수 있다. 그의 속내를 알고 싶어 에둘러 다시 물었다.
-길었던 해고 싸움을 후회한 적은 없는가.=후회하지는 않는다. 당시에는 죽도록 힘들었고 갈등도 많았다. 특히 부모님에게 죄송했고. 회사는 직장 폐쇄를 했고, 직접적으로 얻은 건 하나도 없지만 반대로 그때 싸움을 피했다면 후회가 많았을 것이다. 집 안에서든 일을 하면서든 지금만큼 내가 자존심을 갖고 살아가는 힘은 그때 싸움을 하면서 얻고 배운 것이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다. 이만큼 지내고 봐도 싸움을 피했다고 해서 지금 내가 더 나은 위치에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아이들 키우는 문제만 봐도 내 기준이 있다가도 주변 말에 흔들리기 쉬운데, 그때마다 중심을 잡는 힘이 있다. 그게 다 그때 세상을 보는 눈이나 사람에 대해 경험한 덕분이다. 해고 투쟁의 전략과 전술이라면 다 해봤고 지독하게 고생을 했는데, 다시 그런 상황이 온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좀더 잘 해낼 것도 같다. (웃음)
-지역에서 (강성으로) 잘 알려진 사업장이다. 그만한 이력으로 그와 연관된 일을 해볼 생각은 없었는지, 이를테면 활동가라든가.
=건드리니까 안 싸울 수 없어서. (웃음) 그땐 어쩔 수 없이 닥친 싸움이었으니 최선을 다했지만, 평생 투쟁을 직업으로 삼기는 힘들다. 먹고살아야 하니까. 지금 현장에서 싸우는 사람들도 가장 큰 바람은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지 않나. 목숨을 걸 만큼 치열한 싸움을 했다고 해서 생각과 마음의 변화가 큰 것이지 우리 같은 사람들 생활이 확 달라지지는 않는다. 언제나 그런 현장에 함께 있어주는 분들이나 지원을 해주는 분들이 꼭 필요하고, 그들이 존경스럽다.
-지금 노동 현장에서 일어나는 싸움이나 농성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싸움을 할 때 가장 힘든 일은 회사나 정부 때문이 아니었다. 그 사람들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은 조금 지나면 알게 되기 때문에. 정말 힘든 일은 사람들이 정당함을 알아주지 않는 소외감이랄까 외로움이다. 회사가 무반응으로 나오고 정부가 탄압을 하면 지쳐도 당당하게 대항할 힘을 추스르지만, 일반 사람들이 비난하거나 냉소적으로 나오면 상처를 받는다. 여론이 안 좋아서 파업이나 농성을 포기하는 거, 난 이해가 된다. 여론이란 나 같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반응이다. 회사나 정부나 언론이 왜곡하는 것은 견딜 수 있지만, 보통 사람들의 지탄과 냉대는 이겨내기 힘들다.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을 직접 방문하거나 물질적으로 도와주는 실천 못지않게, 절박한 사람들의 요구 앞에서는 싸움을 경험한 사람들만이라도 앞뒤 따지기 전에 응원하고 지지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와 힘이 된다고 믿는다.
얼마 전 또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부고가 있었다. 40대 가장의 주검을 두고서야 사람들의 관심은 잠깐 되살아났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참담했을 일상과 외로움을 죽음만으로 온전하게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먼저 간 아내와 남은 아이들, 하루 일당도 안 되는 통장 잔고와 치르지 못한 카드 할부금이 낱낱이 죽음에 더해졌다. 이른바 ‘먹튀’ 문제나 회사 쪽의 복직 약속 불이행에 대한 비판이 강하게 대두되기보다는, 마당에 걸린 속옷 빨래처럼 40대 가장의 궁핍과 초라함이 풍경으로 숫자로 세상에 훤히 널렸다.
부산 한진중공업에서는 동료가 목을 매달아 죽음으로 항거했던 35m 크레인 위에서 홀로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는 김진숙씨가 있다. 그 절박함과 처연한 외로움에 대해서도 세상의 인정은 미미하다. 사람들은 재벌이나 대기업, 그 총수의 불법과 부당함에 쉽게 수긍하거나 때마다 애써 자발적으로 근거를 만들어대며 이해를 논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계절이 바뀌도록 공중에서 외치는 절규에 대해서는 물론, 쌓여가는 노동자의 주검에마저, 보통의 그것보다 더한 설명과, 더한 현명함과, 더한 정직과 엄격을 매 순간 여지없이 요구하는지 모른다.
-건강해 보인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남들과 다른 건 없고 짬을 내서 뭐든 배우러 다닌다. 자격증을 따고 그걸로 꼭 당장 뭘 하거나 돈 버는 쓸모를 얻으려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걸 찾고 주저하지 않고 저지른다. 하모니카, DIY(Do It Yourself), 사진, 한국방송통신대학 국문과, 그러니까 사는 게 이렇게 정신없다(홈페이지를 통해 들은 그의 하모니카 연주는 수준급이었다). 형편은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지만, 그걸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걸 보고 배우며 계속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빠르게 변하기로 제일이라는데, 그런 나라의 도시에 살면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면 정체가 아니라 물질이든 정신이든 당연히 도태된다. 그렇게 보면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면서 잘 살고 싶다는 말은 모순이다. 먹고사는 일, 자식 키우는 일 두 가지만 하다가 늙어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뤄질지 장담은 못하지만 직접 찍은 사진을 더해 자신만의 특별한 여행 관련 책을 쓰고 싶은 꿈이 있다. 언젠가 그 작업을 하려고 부지런히 사진을 익히는 중이다. 수명이 점점 길어진다. 나와 같은 처지의 아줌마들도 배워서 그걸 어디다 쓰나 핑계 대지 말고, 동사무소나 복지관의 컴퓨터 수업에라도 겁먹지 말고 용기를 내서 달려들기를 권하고 싶다. 배워서 어디다 쓰긴, 자신에게 쓰면 된다.
신수원 제1회 손바닥 문학상 당선자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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