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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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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기업

등록 2010-11-26 16:12 수정 2020-05-03 04:26

지난호에 어쭙잖은 퀴즈를 냈다. 정답부터 얘기하자면, (ㄱ)에 들어갈 말은 ‘정부’, (ㄴ)에 들어갈 말은 ‘기업’을 상정하고 낸 문제다. 요즘 세간의 관심을 끄는 사건들을 짚어보노라니 한쪽엔 정치권력, 즉 정부가 자리하고 또 다른 한쪽엔 자본권력, 즉 기업이 자리하더라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두 권력이 종종 옳지 않은 일들을 한다는 점은 공통되지만, 그러면서도 정부에 요구하는 기준 또는 수준은 부쩍 높아진 반면, 기업에 요구하는 그것은 여전히 그다지 엄격하지 않다는 문제의식도 작용했다.
요즘의 기업은 대부분 주식회사이고, 그 특징은 법인격(legal personality)과 유한책임(limited liability)이다. 거칠게 말하면, 법인격은 사람이 아닌 조직체로서의 기업에 사람처럼 권리를 누리고 의무를 부담할 자격을 준다는 것이고, 유한책임은 지분 소유자가 자신이 투자한 액수 이외엔 금전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법률적 의미를 세세하게 들먹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단지, 사람이 아니면서도 사람 구실을 부여받고 책임은 제한적으로만 지면 되는 이 조직체의 요즘 행태에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시대에 시민의 일상에 국가권력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게 기업이기 때문이다.
지난번 퀴즈에서 언급한 한 사례는 그 가장 극단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휴식 시간을 빼고는 하루 한 번 이상 화장실에 가지 못하도록 하는 규칙에 대한 얘기 말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나비스코 공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화장실 사용 승낙을 받기 위해서 몇 시간씩이나 기다려야 했다. …“생산라인에서 일할 때는 옷에다 소변을 보라” 그렇지 않고 화장실에 가면 3일 정직에 처한다는 감독내규가 만들어지자… 그들은 “결국 기저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요실금 보조기구와 세탁비로 매주 41달러를 쓸 형편이 되지 않았던 노동자들은 “코덱스(1회용 생리대 상표명)와 화장지를 착용”했는데, 이러한 임시방편 보호대의 경우 소변에 젖으면 인체에 매우 위해하다. -(난장이 펴냄)에서 재인용

국내에서도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으로 운용되는 사업장에서는 이와 비슷한 ‘내규’가 작동할 법하다. 만약 어떤 개인이, 또는 개인들의 집단적 의사로 선출된 정치권력이 이런 규제를 만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냥 참고 있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업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규제를 만들 경우 그냥 통용되거나, 저항이 있더라도 그 정도가 굉장하지는 않을 성싶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요즘 우리 사회에서 관찰되는 기업의 행태 가운데 타인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 측면에서 이에 버금가는 경우가 많고, 그럼에도 사회 전반의 저항이나 제재 움직임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이번호 에도 그 사례는 여럿이며 다른 신문·방송 보도를 살핀다면 사례는 더욱 늘어날 것이므로, 독자들의 밝은 눈을 믿고 사례를 일일이 열거하진 않는다).
이 지점에서 기업에 부여된 법인격이란 건 무엇이며 기업의 유한책임은 어디까지 제한적으로 인정돼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사람이 아니라 그저 사이보그의 인격일 뿐이며 주판알을 튕겨 해결할 만큼만 책임을 지면 된다는 게 법률적 정의인지 몰라도, 과연 그런 특혜를 기업에 부여하는 게 필연적인 것인지, 실제 인격을 지닌 사람의 가치보다 앞서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혹자는 이런 생각을 ‘반기업적’이라고 비난할지 모른다. 요즘 꽤 무서워진 낙인이다. 하지만 기업의 고약한 행태로 인해 고통받는 게 다름 아닌 먹고 숨 쉬고 사랑하는 ‘사람’이란 점을 돌이켜본다면, 이런 맥락에서 ‘반기업적’이란 말은 ‘독재에 반대하는’ 또는 ‘인권을 옹호하는’이란 말과 동의어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지난호의 퀴즈를 이렇게 바꿔 내본다. (ㄱ)은 종종 최고 주권의 담지자인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고 민의를 호도하지만, 그에 대한 저항 또한 클 것이므로 함부로 민간인 사찰이나 ‘친서민’ 사탕발림을 자행하면 안 된다. (ㄴ)은 (ㄱ) 못지않게 종종 최고 주권의 담지자인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고 민의를 호도하지만, 아직은 (ㄱ)만큼 엄격한 잣대로 비판받지 않으므로 적당히 처신하면 될 일이다. (ㄱ)과 (ㄴ)에 들어갈 말은?
한겨레21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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