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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살지 않는 사회

등록 2010-11-02 18:07 수정 2020-05-03 04:26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칠레 광부 33명의 ‘남자의 자격’ 출연이 거론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떠올린 말은 ‘스펙터클의 사회’였다.

세상의 모든 진지함과 빛나는 이름들을 기어이 ‘무릎팍 도사’나 ‘남자의 자격’, 이라는 예능 공화국의 성전으로 끌어내고, 거기서 털어내고 희화화하고야 마는, 그리하여 모든 것이 너절하고도 껄렁한 유희의 제물일 뿐임을 입증해내는 이 고도의 스펙터클 사회가 다다른 경지가 느껴졌다고나 할까.

 

스펙터클 아니면 무관심

새파란 46명의 청춘이 바다 속에서 허무의 죽음에 잠겨 들어갈 때, 우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혹은 하지 않는) 우리의 대단한 선진조국의 현실을 지켜보아야 했다. 대체 왜 그들이 죽어야 했는지에 대한 그 어떤 명확한 규명도 없이, 청년들의 죽음은 철저히 정치적으로만 이용되고, 6개월 뒤 지구 저편에서 죽음의 문턱에서 고스란히 살아 돌아온 광부들의 뉴스가 한국 사람들에게 남다른 감격을 안겼다. 그러나 죽음이 생명으로 고스란히 돌아온 데서 느끼는 우리의 각별한 감격이 차마 말 못할 감동과 아픔에서 멈추지 않고, 그 속에 감춰진 뒷얘기, 옆얘기, 속얘기까지 들춰내며 열흘 넘게 광부들의 탈출을 현실 버전의 이라도 되는 듯 팔아먹고, 그들을 예능 프로에까지 불러들일 계획을 세우는 언론과 방송의 행태를 보며, 갑자기 왜 우리가 이토록 오랜 시간을 먼 나라 광부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심상치 않은 사건들을, 한국의 ‘국익’ 혹은 ‘흥미’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올곧은 시선으로 조명하려 애쓴 방송 <w>를, 예능 프로 하나 늘리겠다고 폐지한 이 마당에. 우리가 언제부터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벌어진 가슴 뭉클하거나 가슴 따끔거리는 일들에 심심한 관심의 시선을 보여왔던가. 광부들의 이야기가 한국 언론의 훌륭한 먹잇감이 되어준 건, 이 스펙터클 사회를 사로잡는 완전한 실제 버전의 스펙터클이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식의 우여곡절과 영웅의 탄생, 거기다 거짓말같이 완벽한 해피엔딩까지. 이 사건이 한 줌 혹은 두 줌의 따끔한 진실을 일깨워주는지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들을 기어이 ‘남자의 자격’에 출연시켜 우리 앞에서 광대 노릇을 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는 그날, 서른세 사람의 생명이 준 뭉근한 감동도, 우리 밑바닥에서 조용히 맴돌던 아픔과 미안함도 사라지고 우린 또 한바탕 공허한 웃음을 텔레비전 앞에서 날리며 대한민국 예능 권력의 위대함을 찬양할 것이다.
기 드보르가 를 써서, 제동 없이 성장해가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환상이나 외양이 실제의 삶을 지배하고 스펙터클이 쏟아놓은 이미지 속에 현대인들이 포박당한다는 사실을 고발한 것은 1967년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발은 전혀 우리 귀에까지 다가와 꽂히지 않은 걸까.
 
재갈 물린 구경꾼
우린 언젠가부터 예능에 지배된 방송, 방송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삶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한 여배우가 “MBC가 전체적으로 엉망”이라고 읊조려주어도 할 말 없을 만큼, 이 나라 방송은 험한 꼴에 이르렀고, 그리하여 우리 삶도 비슷한 경지에 다다르고 있는 듯하다. 스펙터클화된 화면 속에서만 세상을 발견할 뿐 아니라, 현실 또한 스펙터클이라는 조작을 거칠 때, 더 받아들이기 쉬워하는…. 삶의 진정성에 재갈을 물리려는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결국 모든 사람은 구경꾼이 될 뿐이다. 자기 자신의 삶에서도 쫓겨난 가련한 구경꾼.
목수정 작가</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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