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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의 신은 죽었다?

격동의 역사와 함께 성장한 ‘고아의식의 종교’ 개신교…

위기의 징후 속에 불교·가톨릭은 성장주의를 뒤늦게 모방
등록 2010-09-15 15:40 수정 2020-05-03 04:26
한국 개신교는 ‘전통의 단절’ ‘성장주의’ 문화 속에서 성장해왔다. 2009년 4월12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부활절 연합예배 모습. 사진 한겨레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한국 개신교는 ‘전통의 단절’ ‘성장주의’ 문화 속에서 성장해왔다. 2009년 4월12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부활절 연합예배 모습. 사진 한겨레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다.” 2005년 인구센서스를 보며 어느 목사가 한 말이다. 자신이 개신교 신자라고 말한 사람들의 수가 지난 10년 전보다 14만여 명 줄었다. 1.4%에 불과한 소폭의 감소로 호들갑스럽게 위기론을 펴는 것은, 그가 이 결과를 중대한 변화의 한 징후로 보기 때문이겠다.

과거를 부정하는 ‘자발적 고아 의식’

전투적 복음주의자인 그와는 다르지만 나 또한 이 결과를 예의주시한다. 잠시 2005년 인구센서스의 다른 결과를 보자. 개신교의 소폭 감소 외에, 불교 신자는 조금 늘었고, 가톨릭 신자는 거의 배나 증가했다.

그런데 가톨릭 쪽의 일부 논자는 이 증가와 함께 고려해야 할 사안으로 주일미사 참석률이 극히 저조하다는 점을 말한다. 전체 교적자의 25% 안팎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불교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알다시피 불교 신자의 사찰 활동은 개신교 신자에 비해 적다. 게다가 불교 신자는 다른 종단의 신앙 활동에도 참석하는 이가 적지 않다. 이것은 배타적인 충성도를 강조하지 않는 가톨릭이나 불교의 신앙 태도 및 제도 운용 양식과 관련이 있다.

반면 개신교 신자는 신앙제도에 대한 충성도가 높다. 거의 모든 신자가 한 주에 한 번 이상 교회 집회에 참석하고, 매일 나가는 이도 적지 않으며, 교회 밖의 공식·비공식 신앙집회 참석률도 높다. 장례식이나 결혼식 같은 가족사의 중요한 행사를 기독교식으로 치르려는 독점 의식도 현저히 강하다. 기부금 액수도 다른 종단이나 시민단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다.

즉, 개신교 신앙은 다른 종단에 비해 강한 정체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폐쇄적이며 배타적이다. 나는 바로 이 점이 근대 한국 사회와 매우 어울리는 종교의 요소라고 본다. 즉, 한국의 개신교는 한국 근대와 가장 어울리는 종교제도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개신교 신자가 줄고 있다는 것, 그런 징후를 암시하는 2005년 인구센서스 결과, 바로 이 점이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최근의 종교인구 변동이 함의하는 바를 이야기하려면 한국 근대와 종교에 관해 조금 더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더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논의는 이 연재글이 몇 차례 진행된 이후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근대 체험은 매우 빠르고 격렬한 변동들, 그 속에 놓인 격동적인 삶과 더불어 있다. 식민지, 전쟁, 개발독재 그리고 민주화, 소비사회화, 지구화의 기묘한 결합이 분출하는 욕망과 시장만능 사회를 낳았다. 불과 한 세기도 못 되는 시기에 이 모든 사건이 압축적으로 휘몰아쳐 지나간 것이다.

한데 이 격동의 시간들이 남긴 집단적 상흔 속에 공통되게 나타나는 징후가 있다. 이른바 ‘고아의식’이 그것이다. 격렬한 고통의 시간이 지난 뒤 그것이 남긴 상흔 속에 살아야 하는 다음 세대는 과거를 증오했다. 그 (과거) 시간들이 남겨둔 잔해들, 폐습처럼 남은 문화, 그 시간에 살아남은 자들, 그 시간의 부역자들을 청산하자는 구호와 운동에 동원되기도 했다. 이른바 아비를 부정한 아들들이 자기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 그 주체화의 성격과 내용은 달라도, 이렇게 점철된 ‘고아들의 이야기’가 바로 한국 근대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러한 ‘고아들의 사회’에서는 전통이 생각과 행동의 준거가 되지 못한다. ‘고아’라는 정체성은 전통으로부터 자신을 근절시키는 것에서 출발한다. 하여 그들에게 남은 것은 스스로 노력해서 자신을 이루는 것, 이른바 ‘자수성가’에 있다. 다르게 얘기하면 무일푼에서 성공하는 것, 뿌리로부터 스스로를 근절시킨 채 오직 성공을 위해 모든 삶을 투여하는 것. 필경 그 계속되는 역경의 시간들 속에서 정신줄 놓지 않고 살아남아 후손에게 그럴싸한 유산을 남겨놓았다고 자부하게 된, 한국 근대를 살아간 이들의 자화상 속에는 이 ‘자발적 고아의식’이라는 정체성이 놓여 있다.

출세나 명예를 기원하는 기복적 전통은 불교도 다르지 않다. 2008년 수능시험을 앞두고 서울 삼성동 봉은사에서 기도를 올리는 수험생 어머니. 사진 한겨레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출세나 명예를 기원하는 기복적 전통은 불교도 다르지 않다. 2008년 수능시험을 앞두고 서울 삼성동 봉은사에서 기도를 올리는 수험생 어머니. 사진 한겨레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한 손에는 전통 근절, 한 손에는 성장 축복

그런데 이러한 한국적 근대성과 가장 부합하는 종교는 단연 개신교다. ‘전통의 근절’이야말로 어떤 종단도 갖지 못한 개신교적 신앙의 핵심에 속한다. 한국 교회는 교인들의 강한 충성심을 유지하기 위해 전통문화와의 단절을 강력하게 제도화했다. 또한 개신교가 다른 어떤 종단과도 명확하게 구별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성장주의’다. 신의 축복은 세속적 성공과 직결되며, 성령은 그러한 성공의 신앙적 도구와 다름없다. 하여 교회는 양적 성장을 위해 가용자원을 총동원하는 식의 신앙적 담론제도를 발전시켰고, 크든 작든 거의 모든 교회는 마음속에 대형 교회를 품고 있는 의식을 일상화했다. 요컨대 개신교야말로 한국 근대를 함께한, 아니 어쩌면 한국 근대가 그렇게 형성되게 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종교였다. 개신교는 다름 아닌 ‘고아들의 종교’였던 것이다. 이렇게 개신교는 한국 근대의 자발적 고아들과 고락을 같이했다. 하지만 고아들의 자기확인을 넘어 자기초월의 체험으로 이끄는 성찰의 종교는 아니었다.

그런데 2005 인구센서스가 징후적으로 보여주듯 한국의 시민사회는 개신교로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고속성장을 거듭하던 시간에 맞추어진 각종의 종교제도가 문제가 되어 되돌아온다. 신학교를 나온 이들은 부임할 교회가 없어 전전긍긍한다. 많은 교회들은 적자예산으로 고심하고 있으며, 몇 배 뻥튀기된 건물을 증축한 교회는 부도를 맞곤 한다. 게다가 10대, 20대, 30대, 40대 연령층에서는 모두 평균 감소율보다 더 높은 신자 감소율을 보였다. 한때 교회를 선망의 공간으로 바라보았던 연령층의 사람들이 가장 두드러지게 교회를 떠나고 있다.

외부의 시선도 따갑다. 면세, 목회자 세습 등 오랫동안 묵인돼온 관행과 폐습이 문제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부적합한 태도라는 비평이 잇따랐다. 또한 개신교식 포교의 무례함에 대한 비판이 속출했고, 기도원·정신요양소 등 기독교 사회시설의 운영 문제를 다루는 보도 프로그램들이 대중매체를 탔다. 심지어는 기독교계 사립학교에서 벌어지는 종교교육에 대한 인권침해 논란, 재정 불투명성에 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여기에 한국 사회의 수구집단으로 정치세력화를 도모했던 기독교 지도층들의 행보는 정치적 행위자로서 지나치게 서툴렀다. 이에 대해 방송·신문·잡지·학술지 등 많은 대중적·전문적 매체들이 기독교의 정치세력화를 부정적 기조로 다루었다.

어떤 목회자는 교회 밖에서 자신이 목사임을 밝히기가 꺼려졌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그만큼 교회는, 그리고 개신교 성직자들과 신자들은 적잖이 위축되었다. 또한 냉담자층에 속하는 많은 이들은 개신교 신앙을 철회하기 시작했다. 일부 대형 교회를 제외한 거의 모든 기독교 단위는 이런 이탈의 행렬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체감하고 있었다. 그런 차에 2005년 인구센서스 결과가 나온 것이다.

한국 근대를 표상하는 종교 현상으로서 개신교는 이렇게 위기에 처했다. 교회 밖에서 개신교 신앙을 바라보는 많은 이들은 이제 그 신에 대한 경외감을 철회했다. 그리고 그러한 신의 위선을, 신의 권위주의적 이미지를 비판하는 저서들을 열광적으로 독서하고 있다. 이렇게 한국 근대를 함께했고 한국적 근대의 메커니즘을 추동했던 신은 몰락하고 있다.

풍요의 성취보다 간직을 위한 신학으로

개신교 교회의 위기론이 시작될 무렵, 하지만 아직 그 성장세가 둔화되는 징후가 밖에서는 그리 잘 포착되지 않던 시절, 그러니까 1990년대 초·중반, 신흥 종교는 물론 불교나 가톨릭까지도 개신교를 모방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불교는 다양한 성격의 법회를 활성화해 신도들을 더 적극적으로 사찰로 불러모았고, 나아가 도심 곳곳에 포교원을 세워 사람들의 생활터 가까이로 한층 다가왔다. 한데 문제는 그것을 구현하는 아이템에 있다. 가령 ‘학업 원만 성취를 위한 삼천배 철야정진법회’라는 이름에서 보듯 많은 법회들은 우리 사회의 성공주의에 기생하고 그것을 한층 부추기고 있다. 그 밖의 여러 법회들도 개신교 뺨칠만한 상업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가톨릭 안에선 성공주의와 배타주의적 교리관이 결합한 신앙운동이 꽤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개신교의 그것과 흡사하다. 서로를 적대시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가톨릭의 부흥은 계층적으로 중산층에 더 밀접하게 닿아 있고 좀더 지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1970~80년대 개신교의 서민적 성공주의와는 양상을 달리한다. 최근에는 개신교도 중산층적 성공주의의 성격이 현저히 강화되었다. 이어지는 연재에서 더 상세히 살피겠지만, 이러한 변화는 성공에 대한 인식에서 매우 다른 방식의 신학을 만들어냈다. 서민적 성공주의는 신의 축복이 결핍된 상태에서 삶의 조건이 풍요로 전환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있다면, 중산층적 성공주의는 이미 주어진 풍요를 어떻게 간직할지의 문제를 신학화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가톨릭은 후자와 더욱 긴밀하다.

불교나 가톨릭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개신교 따라하기의 요체는 ‘성장·성공’에 있다. 성장을 위한 전략은 개신교의 그것처럼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양상을 띠었다. 물론 이러한 모방은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고, 불교 신자나 가톨릭 신자들 중 다수의 동의와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몇몇 종교학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한국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결핍된 종교들은 오늘날에는 시대착오적이다. 성공이 곧 행복이라고 순진하게 믿었던 근대의 시간은 이미 지나버렸기 때문이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고통을 낳는 성공, 반성 없는 종교

한국 근대는 기념비적 성공을 이룩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최근 많은 이들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 또한 고통을 양산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으로 가득하다. 바야흐로 한국 근대는 열망의 대상에서 성찰의 대상으로 전환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한국 근대에 대한 숱한 검토와 비평이 속출한 것은 그런 이유이기도 하다.

한데 한국의 종교들은 한국 근대를 여전히 ‘성장의 기억’으로만 해석하고 있음이 여기서 드러난다. 시민사회는 그러한 종교의 시대착오성에 혹독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한국 근대인의 신 체험을 표상했던 개신교적 신은 이미 청산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젠 다른 종단들이 그 길을 시작하고 있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민중신학자 김진호씨가 지구화 시대 오히려 한국 사회로 ‘돌아온 신’을 분석하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한국 종교의 과거·현재·미래를 비판적 시각으로 분석하고 전망하는 연재에 관심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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