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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하는 사람, 에스페란토

등록 2010-07-12 21:29 수정 2020-05-02 04:26
희망하는 사람, 에스페란토.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희망하는 사람, 에스페란토.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올여름 해외여행객이 사상 최대를 기록할 전망이라고 한다. 외국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누구랄 것 없이 저절로 작동하는 검열 센서가 있다. 바로 외국어 능력, 구체적으로 말하면 영어구사 능력이다. 가고자 하는 나라의 언어보다 막강한 권능으로 자신감과 열패감의 수위를 면밀히 채점해주는 이 검열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다.

 

세계 언어 평등권 운동

어느 시인은 우리 사회에서 영어를 잘한다는 건 외국어라는 정보 수단을 하나 더 가진 것이 아니라 세계 권력과 통하는 기본 자격증을 가진 것이며 교양과 미의식을 보장받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영어로 인한 불편과 열등감은 영어를 잘하고 못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만은 아니다. 유창한 영어 실력을 자랑하는 유학생들도 자기는 죽어라 영어에 매달려 있을 때 영어권 학생들은 옆에서 편안히 다른 공부를 하는 걸 보면 민족적 한계와 열등감을 느낀다고 한다.

오래전 포르투갈 음악 파두(Fado)에 매료되었다는 한 가지 이유로 가진 것 다 털어 그 나라에 가서 살다 오겠노라 호기를 부린 적이 있다. 가장 먼저 걸린 난관은 역시 언어였다. 일반적이지도 않고 대중화돼 있지 않은 포르투갈어를 습득하는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달리 뾰족한 대안이 없자 곧이어 세계 공용어는 영어라는 견고한 선입견이 작용했다. 그런 한편으로 새삼 영어를 배우려고 끙끙대야 한다는 게 달갑지 않았다. 아이·어른 할 것 없이 영어 익히기에 몸살을 앓는 우리 현실이 지나치게 소비적이고 소모적이라는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영어는 가능하다면 외면하고 싶은 언어였다. 다행히 영어를 따로 학습하거나 연마하지 않고도 먹고사는 데 큰 불편이나 지장은 없었다.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를 평생 강요하는 우리 사회에서 그와 별 상관없이 나름대로 잘 지내온 셈이다. 그럼에도 외국인이나 타 문화를 접하는 수단으로 영어 외에 다른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을 때마다 영어가 지닌 위력이랄까 패권적 무게의 지독함을 실감하고는 했다.

영어가 아닌 언어로 세계를 접하는 방법을 찾다가 알게 된 것이 에스페란토이다. 어느 나라, 어떤 민족에 의한 패권의식이 없는 세계 공용어의 존재를 알았을 때 과연 그게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먼저 일었다. 에스페란토는 어느 민족이나 나라에도 속해 있지 않은 언어로 ‘1민족 2언어주의’ ‘우열 없는 중립어’를 가치로 내세운다. 같은 민족끼리는 모국어로 소통하고 서로 다른 민족과 만났을 때는 상호중립적인 인공어 에스페란토를 사용하자는 것이다. 무엇보다 어떤 사용자도 언어적 우위를 점하지 않는 평등을 지향하는 ‘중립적 교량언어’라는 이상과 이념에 전적인 공감이 갔다. 일찍이 우리나라에서는 1906년 여러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고종황제가 에스페란토어를 습득하기도 했으며, 시인 김억에 의해 강습회가 열려 보급되기도 했다.

평등하고 평화적인 에스페란토의 가치 이념을 접하면서 비로소 오랫동안 영어에 대해 느낀 불편과 무의식적인 억압의 실체가 선명해졌다. 영어가 국제어가 된 것은 국제어에 적합한 언어이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영향력이 거대한 탓이므로 억압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애써 외면했지만 내 안에도 외국어에 대한 소외와 결핍이 없을 리 없었다. 그런 국제어에 대한 생각을 이미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에 포진돼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세계 공용어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세계에스페란토협회는 언어 권력을 배제한 에스페란토의 평등과 평화 연대의 사상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해외여행 대신 에스페란토 탐험을

에스페란토는 ‘희망하는 사람’을 뜻한다. 어쩔 수 없이 떠밀려 감당해야 하는 외국어 공부나 스펙을 위한 점수 쌓기가 아닌,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을 접하는 수단으로, 세상과 세계와 소통하는 언어로 부족함이 없는 에스페란토. 올여름 봇물을 이루는 해외여행에 편승하는 대신 120여 개 나라에서 통용될 수 있는 세계 공용어 에스페란토를 탐험할 계획을 세웠다. 꾸준히 공부하며 그 언어로 번역된 각국의 서적과 창작물을 읽고, 세계인들과의 소박한 교류를 일상화하는 풍요로운 희망을 에스페란토를 통해 꿈꾼다.

신수원 ‘손바닥 문학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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