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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세의 눈물은 왜 아름다운가?

등록 2010-07-06 23:29 수정 2020-05-03 04:26
정대세.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정대세.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이번 월드컵에서 흥미로웠던 건 북한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한 재일동포 정대세에 대한 관심이었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월드컵 경기장을 밟은 감격에 북한 국가가 울려퍼지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울던 그의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인터넷은 물론이고, 언론들도 정대세 선수에 대해 이례적인 관심을 보였다.

정대세 선수에게 이런 반응은 무엇을 암시하는 걸까? 천안함 정국을 기화로 보수우파의 반북 이데올로기 공세가 최고조에 달한 시기에 나타난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남한이 아니라 북한을 ‘조국’으로 선택해서 월드컵 무대를 밟은 ‘괘씸한 선수’에 대한 호의적인 대중의 관심은 대북강경책으로 일관하는 정부의 정책 기조와 확실히 어울리지 않는다. 정대세 선수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은 월드컵을 통해 드러난 ‘미학적 정치성’을 적절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월드컵을 통해 드러난 미학적 정치성

한국 사회에서 월드컵은 현실 정치와 다른 차원의 정치성을 드러내는데, 이를 미학적 정치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정치성은 사회적 질서를 강제하는 위계화와 정치적 이해관계를 무력화하는 차원을 열어놓음으로써, 습속에 따른 판단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현실에서 작동하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의미를 상실하는 순간이 도래하는 것이다. 이 순진무구한 시공간에서 정대세 선수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대변하면서 전혀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여기에서 잃어버린 것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바로 민족이다.

물론 이 민족은 존재한 적도, 존재할 수도 없는 순수하고 절대적인 대상이다. 존재한 적도,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언제나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민족이 정대세 선수의 눈물을 통해 환기된 것이다. 이 민족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나눠가져야 할 ‘대의명분’인데, 월드컵이라는 비정치적 순수 공간은 이것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민족의 스펙터클이 정대세 선수라는 상징을 통해 유령처럼 출몰한 셈이다.

세계화가 만들어낸 상황은 ‘민족에 대해 말하지 않기’지만, 흥미롭게도 월드컵 경기가 잘 보여주듯이, 현실에서 민족국가의 정체성이 퇴거하면 퇴거할수록 상징적 차원에서 민족은 더욱 기승을 부리며 현시한다. 현실로 내려오면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민족주의이지만,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지고한 즐거움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대중을 끌어당기는 매혹은 강렬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런 측면에서 정대세 선수의 눈물은 잉여 쾌락의 일종인 민족주의의 매혹을 정확하게 보여준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다.

정대세 선수가 북한 국가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을 때, 거리응원을 위해 모여 있던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하나 된 민족’을 실현해야 한다는 오래된 정언명령을 상기했을 것이다. 이는 단순하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랫말이 지칭하는 당위 명제를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만들어낸 ‘히스테리 주체’들이 민족이라는 절대적 ‘아버지’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강렬하게 깨달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잃어버린 민족을 대변하는 정대세의 눈물

시장주의는 우리 모두를 히스테리로 만듦으로써 이윤을 극대화한다. 우리는 남의 욕망을 나의 것으로 삼을 때 비로소 시장경제에 적합한 소비자로 거듭날 수 있다. 필요 없는 상품을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수적인 것이다. 이 과정이야말로 자본주의적 히스테리 주체들이 탄생하는 경로다. 이런 주체들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게 바로 민족이나 자유 같은 숭고한 대의명분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다. 정대세 선수의 눈물은 이런 헌신의 숭고함을 보증해준다. 이 상황에서 현실의 남한과 북한을 구분하는 경계는 사라진다. 오직 정대세 선수의 눈물만이 진정성을 드러낸다. 이처럼 민족은 순수한 진정성의 상태에서만 가능성을 확인받을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북한 국가대표팀과 정대세 선수는 공감의 대상이지 경쟁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보수우파의 반북 이데올로기 공세가 월드컵 국면에서 별반 힘을 발휘하지 못한 까닭이다. 월드컵이라는 지극히 비정치적 매개가 정치적 효과를 만들어낸 희귀한 경우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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