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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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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표의 상식

등록 2010-05-12 14:12 수정 2020-05-03 04:26

지금은 아주 심플하게 상식의 영역에 속하는 일도 그 출발은 이단이었던 경우가 많다. 누구나 평등하게(나이에 따른 차별은 제외하고) 한 표씩 행사하는 지금의 선거제도도 그중 하나다. 선진국으로 불리는 스위스에서 여성 참정권이 실현된 게 1971년부터란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놀라운 일이다.
미국에서는 흑인들이 참정권을 누리기 시작한 게 1870년이고, 여성은 1920년에야 투표권을 얻었다. 앞서 백인 남성들이 투표로 자신들의 지도자를 선출하게 된 과정도 간단치는 않았다. 영국 국왕의 지배를 벗어나려면 독립전쟁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막상 전쟁을 벌이기 전 대다수 미국인은 영국의 식민통치가 부당하다는 느낌을 받을지언정 독립, 그러니까 왕의 통치를 거부하는 일에 선뜻 동의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때 세습 왕정의 부당성을 정면으로 공격하며 식민지 미국인의 심금을 흔들어놓은 게 토머스 페인이었다. 그는 “지구상의 어느 동떨어진 곳으로 이주한 소수의 사람들”을 상상하며 정부의 기원에 대해 설명한다. 척박한 환경에서 홀로 살아갈 수 없는 그들은 자연히 사회를 이뤄 협력하게 되지만 “이주 초기의 어려움이 점차 극복돼감에 따라, 그들은 불가피하게 서로에 대한 의무와 애정을 망각하기 시작할 것”이고 어긋나는 사회적 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정부를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 “어떤 적당한 나무가 그들에게 의사당을 제공해주고, 그 나뭇가지 밑으로 식민지의 모든 주민이 공적인 문제를 숙고하기 위해 모”이게 되는 게 정부의 기원이란 설명이다. 인구가 많아지고 지역이 넓어짐에 따라 사람들은 대표자를 선출하는 방식을 고안하고, “피선출자들이 선출자들과 관련 없는 이익을 떠올리지 못하게 하려면 선거를 자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도 깨닫는다. 그렇게 피선출자를 빈번하게 교체하면서 정부는 사회 구성원 공통의 이해관계를 추구하게 된다. 그러니 “한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까마득히 높은 자리에 앉히”고 그 자리를 세습하게 하는 왕정은 정부의 본질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역사는 “그렇게 자주 인류에게 사자(능력 있는 왕) 대신 당나귀(형편없는 왕)를 줌으로써 왕위 계승권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는 독설도 덧붙였다. 이런 내용이 담긴 페인의 팸플릿을 읽은 미국인은 “눈빛이 확 달라졌다”고 한다. 인구가 300만 명가량이던 당시 미국에서 이 팸플릿이 3개월 사이에 12만 부나 팔렸단다.
장황하게 인용했지만, 페인의 팸플릿 제목은 심플하게도 이었다. 지금은 상식이 된 바로 그 상식이다. 그런 상식으로 이번 지방선거도 치러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적어도, 왕 노릇 하려는 이들이나 선출자들과 관련 없는 이익을 떠올리는 이들은 교체시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세금을 거둬 어려운 주민을 돌보는 데 쓰기보다 호화청사 건립을 서두른다거나, 불법·비리를 저질러도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당나귀들은 엉덩이를 때려 쫓아버리는 것이다.
첨언하자면, 한 개인은 왕처럼 군림하기 어려운 시대라고 해도 어떤 정치적 집합체는 그런 호사를 누릴 수도 있지 않느냐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불법·비리를 저질러 자리에서 쫓겨난 자를 공천했던 정당이 뻔뻔하게도 그 선거구에 또 누군가를 공천하는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세습이 아니라 선출에 의해 결정되는 자리인데도 그런 행태가 통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자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상식이 되고 있다. 우리는 을 다시 써야 할까보다.
또 첨언하는데, 편집장이랍시고 이번주도 왕 행세를 하며 무리한 요구를 많이 했다. 기자들에게 미안하다.

한겨레21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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