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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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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해도 무사한가

등록 2010-04-27 14:03 수정 2020-05-02 04:26

기자는 원초적으로 ‘묻는 사람’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은밀한 내막에 대해, 이웃이 살아가는 남루한 삶의 내막에 대해, 구린내 나는 패악질의 내막에 대해, 웃음 나는 유흥의 속살에 대해 묻는다. 즉, 취재한다. 말을 하기보다 말을 듣는 걸 더 좋아하는, 숙맥같이 어눌한 인간에게 더없는 직업이다. 물론 그러다 보면 상대방이 대답하기 저어하는 질문, 사람 가슴팍을 후벼파는 질문, 서로 쓰게 웃고야 마는 어리둥절한 질문도 하게 된다. 해야 한다. 기자는 묻는 사람이다.
그래서 기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인간 유형이 대답을 안 하는 부류다. 그 첫손가락에 군이 꼽힌다.
“…했단 말이죠. 그렇죠?”
“그건 군사기밀이라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이런 식이다. 군사기밀은 물불 가리지 않는 사건기자 초년병들에게도 마법처럼 통한다. 다들 육군 병장, 적어도 상병 출신이다. 안보의 중요성을 유전자 깊이 각인시키는 교육을 거쳐 짬밥 질리도록 먹으며 녹색 군복과 자신을 동일시한 경험까지 갖춘 이들이니까. 버스 타고 지나며 뻔히 보아온 군부대 위치도 군사기밀이란다. 그래도 지켜줬다. 군사기밀이라니. 적어도 이번 천안함 침몰 사고 전까지는 그랬던 것 같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 싶다. 온 국민을 미스터리 작가로 양성하겠다는 기세로 군은 기밀을 내세운다. 민·군 합동조사단은 ‘민’이 들어갔는데도 미지의 세계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까지 알고 싶은 게 국민의 마음인데, 일거수일투족조차 공개하지 않는다. 국가안보와 직결된 중차대한 문제인데, 바로 우리의 안위와 관련된 문제인데, ‘민’은 빠져 있으라 한다. 기자는 복장이 터진다.
한술 더 뜨는 건 검찰이다. 검사는 이런 식으로 답한다.
“…했다는데 사실인가요?”
“니가 뭔데?”
아연하다. 방송에서 실연된 이 장면을 보면서 묻는 사람, 기자로서 열이 오르는 걸 자제할 수 없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액추얼리, 아이 앰 어 저널리스트”라고 해야 하나? 민주국가의 중추를 떠맡고 있는 이른바 엘리트 집단의 고위층이 민주사회를 작동시키는 또 하나의 축인 언론의 기능 수행에 대해 그런 식으로 대거리했다는 일이 믿기지 않았다. 의회와 행정부, 행정부와 행정부, 언론과 의회, 행정부와 언론, 언론과 시민, 시민과 시민… 이렇게 민주국가의 구성요소들 사이에 서로 묻고 답하는 과정이야말로 민주 정체의 핵심이 아니던가. 그것이 검사와 시민 모두 수호해야 할 헌법적 가치 아니던가. 사법시험에는 그런 걸 묻는 문제가 나오지 않는단 말인가.
맞다. 언론인만이 묻는 사람은 아닌 것이다. 시민이라면, 아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묻고 싶은 것이 있고, 그 물음을 거쳐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합당한 이유 없이 그 권리를 막는 것은 정치적 패악질과 다름없다. 예를 들면….
지난해 서울에 광화문광장이란 게 생겼다. 넓은 도로였던 곳의 한가운데를 뚝 떼어내 시민에게 돌려주겠다며 광장을 만들었다. 그런데 분류상 그곳은 여전히 ‘도로’란다. 그곳에서 집회·시위를 하는 건 도로를 점거하는 셈이 된다. 그러니 불허한단다. 지금까지 허가된 집회는 한 번도 없었다. 시원하게 트인 광장에서 시민들은 자기주장도 펼 수 없다. 장애인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1인시위도 경찰이 틀어막는다.
이렇게 군과 검찰과 경찰이 시민의 물을 권리를 옥죈 사례를 돌이켜보면, 떠오르는 건 히틀러의 나치즘, 일본 천황의 군국주의, 스탈린의 사회주의, 박정희·전두환의 군사독재다. 아연한 기자는, 시민은, 다시 원초적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나는 물어도 괜찮은가. 정녕 궁금해도 무사한가.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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