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사형제는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1996년에 이어 14년 만에 똑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사실 똑같지는 않다. 앞서 9명의 재판관 중 2명에 그쳤던 소수 의견(위헌)은 이번에 4명으로 늘어났다. 이를 두고 일보 전진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이번 위헌법률심판 사건에 처음부터 참여했던 이상갑 변호사는 다른 말을 했다. 1996년 결정에서 후퇴했다는 것이다.
“한 나라의 문화가 고도로 발전하고 인지가 발달하여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가 실현되는 등 시대 상황이 바뀌어 생명을 빼앗는 사형이 가진 위하(위협)에 의한 범죄 예방의 필요성이 거의 없게 된다거나 국민의 법감정이 그렇다고 인식하는 시기에 이르게 되면 사형은 곧바로 폐지되어야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벌로서 사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당연히 헌법에도 위반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다.”
14년 전 헌재 결정문의 일부다. 합헌을 선고하면서도, 문화 발전과 사회 안정화에 대한 법철학적 통찰을 담아 사형 폐지에 대한 시대론적 접근을 공식화한 문장이다. 사형 폐지가 헌법에 절대적으로 어긋나는 것은 아니며, 우리 사회가 더 문명화한다면 얼마든 가능한 일이라는 뜻을 피력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 헌재 결정에서는 이런 접근법이 사라졌다는 게 이 변호사의 허탈한 평석이었다. 지난 14년간 세상은 전진하지 않았다는 것일까? 1996년 이후 각 사회의 문명은 어떻게 진화했는지 바깥으로 눈을 돌려보자.
1996년 벨기에가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1997년 그루지야, 네팔, 폴란드,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볼리비아는 일반적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일반적 범죄라 함은 전시나 계엄 등 비상 상황에서 저질러진 범죄를 제외한 평시의 범죄를 말한다. 헌재는 이번 결정에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할 수 있다’는 우리 헌법 110조를 근거로 ‘헌법이 사형을 전제하고 있다’는 논리를 폈는데, 외국의 경우엔 일반 재판과 군사재판을 구분해 후자에서만 사형을 인정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 헌법도 이런 취지로 해석할 여지가 분명히 있어 보인다.)
1998년 아제르바이잔, 불가리아, 캐나다,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영국 등이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1999년 동티모르, 투르크메니스탄, 우크라이나 등이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라트비아가 전시를 제외한 평화시의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2000년 코트디부아르와 몰타가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알바니아는 일반적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이후 2007년 모든 범죄로 확대했다.)
2001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칠레는 일반적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2002년 키프로스와 유고슬라비아(현재의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2003년 아르메니아가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2004년 부탄, 그리스, 사모아, 세네갈, 터키 등이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2005년 라이베리아와 멕시코가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2006년 필리핀이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2007년 알바니아, 쿡 아일랜드, 키르기스스탄, 르완다 등이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카자흐스탄은 일반적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2008년 우즈베키스탄과 아르헨티나가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2009년 부룬디와 토고가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일부 늦둥이 유럽 국가를 빼고는 대부분 아시아와 아프리카 나라들이다. 이 모든 나라들의 그간 역사를 개괄하기도 이 지면으로는 벅차다. 분명한 건 상당수가 평탄치 않은 내전과 독립과 혁명의 현대사를 통과한 나라들이라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헌재의 1996년 결정에 따르면, 21세기로의 전환기를 맞아 그런 나라들에서도 모종의 문명화가 진행된 게 틀림없다. 그럼, 우리나라에선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헌재 관계자는 이번 결정에 대해 “합헌 의견을 낸 재판관들도 입법 개선을 촉구하는 별개 의견들이 많다. 사실상 사형제 폐지를 공론화했다고 보면 된다”고 자평한 것으로 전해진다. 시대가 바뀌면 사형제를 폐지하게 되리라던 헌재 재판관들이 사형제 폐지는 우리가 판단할 게 아니니 공론화에 맡기자는 태도로 변화한, 딱 그만큼의 시대 변화가 있었다는 말일까.
1996년 헌재 결정 이후 은 매주 한 차례씩 666번 잡지를 낸 끝에 800호를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그사이 무수한 사형제 관련 기사를 썼고, 지난해 봄에도 표지이야기로 사형제 폐지를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800호를 자축하기에 앞서 자괴감이 드는 이유다. 첨예한 사회적 쟁점에 대해 공론화를 시도하고 그 좌절에 자괴감을 느끼는 건 나 같은 신문쟁이·잡지쟁이의 몫이다. 이와 달리 헌재는 종국적 결정을 내리는 최고 국가기관이다. 이제 와서 공론화나 운운하려면 차라리 법복을 벗는 게 낫다. 그냥 솔직히 고백하시라. 헌재가 보기에 대한민국은 앞에 나열된 저 모든 나라들보다 덜떨어진 국가라고 본다고. 적어도 당신들의 머릿속에 표상된 대한민국은 그런 나라에 불과하다고.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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