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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21] 신코프의 교훈

등록 2010-02-09 16:35 수정 2020-05-03 04:25

2년6개월 전의 일이다. 추석 연휴였다. 고향집에서 낮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니 휴대전화 액정 화면이 오후 2시22분을 가리켰다. 동네 목욕탕에 갔다. 시계를 보니 3시33분이었다. 체중계에 올라섰다. 66.6kg이었다. 나오는 길에 시계를 다시 봤다. 4시44분이었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저녁을 먹었다. 반주를 마셨다. 몸이 더워졌다. 뒷목으로 열기가 뻗치더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왜 이러지.’ 혼잣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혀가 말을 듣지 않았다. 찬 바람을 쐬려고 아파트 베란다로 나갔다. 머리 위로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가슴이 마구마구 뛰었다. 찰나의 순간,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이게 죽는 건가. 그렇다면 담배 한 대 피우고 싶은데.’
그리고 쓰러졌다. 명절 만찬을 즐기려던 부모님, 아내, 딸아이가 식겁했다. 대바늘로 사지를 따고 얼음물을 끼얹고 구급차를 불렀다. 119 구급대원이 접이침대에 날 실었다. 겨우 의식은 돌아왔지만, 기력이 없어 눈을 뜰 수 없었다. 아파트 주민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옴마야, 무슨 일인교. 누구라예?” 동네 아줌마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우리 아들. 술 마시다가 갑자기 이래 됐다.” 어머니의 그 대답 덕분에 101동 1002호 맏아들이 알코올중독자로 소문나는 게 아닐까, 구급차에 실려가며 생각했다.
병원 응급실에서 의사들이 속삭였다. “아무래도 신코프 같은데.” “그렇지?” 죽을 병이라는 건가, 아니라는 건가. 나의 맥은 자꾸만 느려졌다. 힘이 하나도 없었다. 며칠 뒤 ‘틸트 검사’라는 걸 받았다. 판자에 묶어 세워놓고 심박을 빠르게 하는 약물을 주사했다. 심장이 벌떡벌떡 뛰어 터질 것 같았다. 의사는 내 앞에서 네이버 증권 코너에 들어가 시황을 확인하고 있었다. “가슴이 막 뛰어요.” “그냥 좀 참으세요.” 컴퓨터 화면에서 눈도 떼지 않고 의사가 말했다. 검진 결과, 심혈관 계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과로·스트레스 때문에 자율신경계에 이상이 생겨 ‘신코프’가 왔다고 했다. ‘신코프’(syncope)는 졸도·기절이라는 뜻이었다. 심장쇼크나 뇌졸중 등이 아니라 그저 기절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저 기절했다’니, 말도 안 된다. 기절하기 이틀 전, 나는 신문사 노동조합 전임자 임기를 끝냈다. 1년 임기 동안 대표이사가 중도 사퇴하고, 편집국장이 밀려나고, 새 편집국장 후보가 투표에서 부결됐다. 노동조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격변’이었다. 내 딴에는 신문사의 미래에 중대한 일이라 생각했으므로 헌신했고 몰입했다. 상처를 주고받았다. 신코프는 지난 1년에 대한 응징이었다. ‘헌신하지 마라. 모든 걸 바치지 마라. 남을 아프게 할 것이고, 너도 쓰러질 것이다.’ 신코프는 그렇게 나를 흔들어놓고 떠났다. 에서 맞는 두 번째 설이다. 헌신까진 몰라도 여전히 바쁘다. 그 결에 상처 입은 몸과 마음이 있다면 미안하다. 신코프의 교훈을 잠시 잊어서 그렇다.
안수찬 기자 blog.hani.co.kr/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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