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조용한 화제작 을 봤다. 해발 1300m 알프스 깊은 산속 카르투지오 수도원의 일상을 담은 이 다큐멘터리는 과연 침묵을 경청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를 여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가장 규율이 엄격하다는 그곳에서 자급자족의 원칙을 지키며 묵언 수행을 하는 수사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음소거 버튼을 누르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영원과 맞닿은 공간 안에서 조용히 존재의 의미를 구하는 모습은 경건하고 아름다웠으나 단순히 평화로운 풍경만은 아니었다. 그들의 침묵은 무엇보다 적극적인 발화 행위였다. 그들은 말을 지움으로써 더 쉽게 미소 지을 수 있었고, 더 깊게 간절한 대화를 꿈꿀 수 있었고, 더 가깝게 삶의 시간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바싹 귀를 기울인 채 무언가를 듣고 싶게 만들었다. 그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무수한 의미를 품은 긴 행간
침묵을 비겁한 방어의 일종으로 여겼는데, 아니었다. 때로 침묵은 역으로 우리 내면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공격도 될 수 있었다. 침묵은 문장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세상에서 제일 긴 행간으로 그 안에 무수한 의미를 품을 수 있었다. 영화를 본 뒤 퍼지는 침묵의 메아리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집에 돌아와 막스 피카르트의 를 펴들었다. 책에는 오래전 내가 밑줄을 그어놓고 잊어버린 글들이 있었다. “인간이 침묵을 관찰한다기보다는 침묵이 인간을 관찰한다. 인간은 침묵을 시험하지 않지만 침묵은 인간을 시험한다” “인간은 말을 통해 침묵을 듣는다. 진정한 말은 침묵의 반향인 것이다” 등의 문구가 그제야 한결 마음에 와닿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쓸쓸한 생각도 일었다. 저 알프스 계곡의 수도원은 너무나도 머나먼 곳이었다. 그곳 수사들의 침묵은 자유로운 의지이자 선택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숭고해 보이기는 했으나 결국 그 침묵은 나의 모국어는 아니었다.
차라리 말이나 하지 말지. 한숨이 절로 나오는 요즘의 온갖 졸렬하고 비겁하고 위선적인 말들의 향연을 보다 보면, 말과 말의 혼인인 약속은 거침없이 뒤집고 깨뜨리면서, 자신의 말이 진실이 아니라고 확인되자 길길이 뛰고 난리치며, 그리하여 그 무식하고 우악스런 말들을 끝내 관철하려 또다시 내뱉는 말들을 듣노라면 만국 공통어인 침묵이 반드시 절실해진다. 그 말들이야 이미 말의 순정을 배반한 것이니 귀 막으면 그만이다 싶다가도, 정작 입 좀 다물어주셨으면 하는 자들은 입에 모터를 달고 떠드는데 그 말들에 데고 치여 차라리 침묵을 택한 자들이 지금 이 시간 알프스 수도원이 아닌 대한민국 어딘가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에 우울해진다. 어쩌면 침묵이라기보다 실어증이란 표현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처음부터 입을 다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 뜻을 전했고, 부당함을 표현했고, 때론 온몸으로 맞서기도 했으나 결국 자신들이 아무리 목이 터져라 외쳐봐야 누군가는 이를 침묵으로 받아들이는데 무슨 수가 있겠는가.
침묵과 실어증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침묵은 대화의 하나지만 소통을 거부당한 채 막다른 골목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침묵은 그저 말의 고통일 뿐이다. 이 시끄러운 세상에서 점점 멸종돼가는 귀한 침묵. 그러나 거듭되는 대화의 실패로 마지못해 택하게 되는 침묵은 너무 흔하다. 그리고 흔하기에 안타깝다. 그 무기력하고 허망한 침묵이 입을 열어 뜨거운 일갈을 토해내기를 당장 바라는 것은 무리겠으나 지금 혹시 오랜 단절 누적으로 말을 잊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그 언젠가를 위해 그 침묵을 잘 발효시켜주셨으면 한다. 때론 말보다 강하게 나를 지켜주는 것이 침묵이고, 내 안의 말을 가장 잘 들어주는 것 또한 침묵이므로. 그리고 이 소망이 이루어지지는 않겠으나, 우리로 하여금 고요한 세상을 미치도록 갈구하게 만드는, 제발 입 다물 필요가 있는 자들에게는 ‘침묵 할당제’를 부여하면 어떨지, 그냥 꿈이나 한번 꿔보고 말이나 한번 해본다.
이지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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