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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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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나이테 측정법

등록 2010-02-03 10:21 수정 2020-05-03 04:25

타티아나는, 나와 또래니까, 옛 소련 체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소련이 해체된 뒤 고향인 카자흐스탄에서 변호사로 일한다. 2000년대 중반 미국의 한 로스쿨에서 연수할 때 그를 만났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10여 명이 같은 프로그램에서 공부했는데, 타티아나는 유독 내게 친절했다. 그는 카자흐스탄에 사는 우리 동포들, 그러니까 고려인들과 친했고, 그곳 토착민인 카자크족도 우리와 생김새가 비슷해서 내게 친근감을 느꼈다고 한다.
나는 그런 친절에 감사하는 것을 넘어 그에게 과도하게 친절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영어 때문이었다. 귀머거리와 벙어리를 키워내는 우리나라 영어 교육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나는 다른 동료들로 하여금 어떻게 입학 허가를 얻어냈는지 의구심을 느끼게 할 만큼 회화에 무능했다. 타티아나는 그런 내게 통역자 아닌 통역자가 돼주었다. 여럿이 대화하는 도중 내가 맥락을 놓쳤다는 표정을 지을 때면, 타티아나는 또박또박 그리고 천천히 그들 대화의 요지를 간추려줬다. 간혹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입안에 잔뜩 물고만 있을 때도 그는 내 마음을 짐작하고는 상대방에게 내 뜻을 유창한 영어로 전달해주곤 했다. 그는 러시아말 억양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것을 제외하고는 원어민과 다를 바 없는 영어를 구사했다.
어느 날 하굣길에 나의 그 ‘이상한’ 영어 실력이 화제가 됐다.
“너는 왜 어려운 영어 책은 읽을 수 있으면서 말하는 건 그 모양이지?”
“우리나라 영어 교육에 문제가 있어서지.”
“그래도 너는 토플 시험을 보고 학교가 요구하는 점수를 얻어 여기 왔잖아. 몇 점이나 받았지?”
“263점(CBT).”
“정말? 오 마이 갓! 나랑 점수가 같잖아.”
“네 점수가 왜 그것밖에 안 되지?”
“이해할 수 없군.”
“나 역시.”
나는 내가 중·고교 시절부터 입사 시험 때까지 겪은 영어 공부의 현실과 토플 시험 점수를 올리기 위한 한국 학생들의 피나는 노력, 인터넷에 난무하는 온갖 비법 등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 더듬거리며 말했기에, 본론이 무르익기도 전에 우리는 기숙사에 도착해버렸다.


알다시피, 토플은 영어 문장을 이해하는 능력, 어휘력, 강의를 듣고 이해하는 능력, 영어로 글 쓰는 능력 따위가 골고루 갖춰져 있는지를 본다. 하지만 이런 영어 능력의 총체를 일일이 다 따져보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한 단면을 잘라보는 게 시험이다. 영어 능력을 하나의 나무에 비유한다면, 밑동의 적당한 지점을 잘라 나이테를 확인해봄으로써 얼마나 잘 자란 나무인지 살피는 것이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온갖 시험에 시달리며 ‘시험의 달인’이 된 한국 학생들은 묘목을 심어 둥구나무로 키우기보다는 어디선가 두툼한 통나무 한 토막을 구해오는 편이 낫다는 걸 잘 안다. 잘라본 결과야 똑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똑같이 지름 263mm의 나무였지만, 타티아나의 것은 쭉 뻗은 가지와 무성한 잎, 게다가 하얀색 껍질까지 지닌 멋진 자작나무였고, 내 것은 이끼 낀 나무토막에 불과했던 것이다.


20년이 넘는 영어 공부 과정에서 진정 영어에 흥미를 느껴본 것은, 안타깝게도, 서른 중반에 떠난 미국 연수에서였다. 국제인권법을 공부했는데, 각종 인권 관련 논문이나 외국 법원의 판결문 따위를 읽으며 그 빈틈없는 논리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새긴 알파벳 활자에 깊이 빨려 들어갔던 시절이었다. ‘영어가 이렇게 아름다운 언어였구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학창 시절부터 내가 정말로 관심 있고 감동받을 수 있는 내용의 영어 책이나 문학작품, 논문 따위를 접할 수 있었다면 영어를 훨씬 재미있고 열정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겠다는 자책 아닌 자책을 했다.
지금의 청소년들에게도 그들의 관심거리를 담은 텍스트를 스스로 교재로 선택하게 하고, 영어 교사는 아이들과 어울려 그 각각의 텍스트를 통해 지도하고, 입시에서는 아이들 각자의 관심거리를 소재로 독해나 회화 능력을 따져본다면, 영어가 지금처럼 아이들을 괴롭히지는 않을 것이다(타티아나가 소련 시절 영어를 공부할 때는 미국의 인종차별 등이 영어 교재의 주된 내용이었다고 한다. 어릴 때 레닌을 존경했다는 그는 미국을 비판하는 영어 교과서에 흠뻑 빠져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실력 면에서도 월등한 향상을 보이리라 확신한다. 강요하지 않아도 알아서 빠져들 테니까.
학원 강사가 미국 대학입학자격시험(SAT) 문제를 빼돌렸다가 적발된 최근의 사건을 접하며 떠오른 생각이다. 나라 망신을 따지기 이전에 아이들이 덜 고통스럽게 영어를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무얼까 먼저 생각해야 할 것 같아서다.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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