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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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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혼의 해

등록 2009-12-30 15:11 수정 2020-05-03 04:25

2010년은 초혼(招魂)의 해다.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그린 일대 사건들이 100주년, 60주년, 50주년, 40주년, 30주년을 맞는다. 역사의 회오리에 휘감겨 아프게 이 땅의 생을 마감했던 영혼들을 다시 불러내 기려야 하는 날들이 우리 앞에 즐비하다.
2010년 8월29일은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날이다. 데라우치 통감과 이완용 총리대신이 한일합병 조약을 체결한 현장인 조선통감 관저는 서울 남산에 빈터로만 남아 있지만, 푸른 소나무 같은 기개로 일제에 저항하다 숨져간 독립투사들의 혼은 아직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뿐이랴.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 이국의 낯선 흙에 묻혀야 했던 남자들과, 평생 잊지 못할 치욕을 매일 밤 강요당하다 붉은 꽃처럼 져버린 여자들의 영혼은 천릿길 만릿길을 되짚어 지금쯤 고향으로 돌아왔을지 모를 일이다.
2010년 6월25일은 한국전쟁이 터진 지 60년째 되는 날이다. 전쟁에 아무런 책임도 없으면서 무명고지에서 젊은 생애를 끝마쳐야 했던 남북의 군인들과, 오인 사격으로든 고의적인 학살 작전으로든 무참히 짓이겨진 민간인들과,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만으로 후퇴하는 군경에게 ‘청소’당했던 보도연맹원들의 혼령은 휴전선 철조망을 붙들고 흐느낄 것이다. 아직 억울한 죽음의 진실은 다 밝혀지지 않았는데 어느덧 한 갑자가 다했다니.
새해에는 그들의 이름을 불러 오늘날 자주와 평화의 참뜻을 되새겨야겠다.
그리고 2010년 4월19일과 5월18일이 오면, 우리는 서울 수유동과 광주 망월동을 찾아가 독재에 항거해 목숨을 버린 꽃다운 영령들을 깨워야겠다. 지난 50년, 30년 세월 동안 그들의 죽음을 양분 삼아 걸음마를 배우고 앳된 소년티를 벗고 어느덧 어른으로 커가는 듯했던 민주주의는 난데없는 한파에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고 있다. 다시 그들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불러야겠다. 산야에 개나리·진달래가 흐드러질 무렵.
그래, 봉하마을 뒷산에도 눈꽃이 지고 봄이 찾아와 무르익을 그 무렵, 노무현 전 대통령의 1주기가 찾아온다. 그때쯤이면 연세대 뒷동산의 진달래는 이미 지고 김대중 전 대통령 사저의 영산홍과 철쭉이 보기 좋게 피어 있겠다. 더위가 찾아오고 산색이 짙푸르러지면 김 전 대통령을 떠나보낸 지도 1년이 된다. 아마도 이 땅은 다시 한번 그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하는 인파로 가득할 것이다. 지나간 1년 동안 남은 자들이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못했는지 아프게 돌아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새해는 달력 한장한장마다 혼들을 불러내는 시를 적어넣어야 할 해다. 소월의 ‘초혼’은 2010년의 노래다. 그리고 그 시들이 모여 정치가 되는 해다. 2010년 6월2일 지방선거가 치러진다. 산산이 부서지고, 허공 중에 헤어지고, 부르다가 내가 죽을 그 이름들의 물음에 조용히 대답해야 할 해다.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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