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노예와 얼마나 다른가.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지난 스무 날 남짓한 기간, 나는 어느 시골 마을의 축사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의 단골 아이템인 ‘노예’를 구출하기 위해서였다. 제보자는 서른을 갓 넘긴 청년이 정당한 대가 없이 노예처럼 일하고 있으며 마치 사육당한 짐승처럼 무표정하게 일만 하고 있다고 전했다.
축사를 좀체 떠나지 않는 주인 부부가 잠깐씩 자리를 비우는 틈을 타서 우리는 흡사 간첩처럼 잠입해 청년의 사정을 물었다. 그는 의외로 술술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13년째 월급은 받아본 적이 없으며, 언젠가 목돈을 주리라고 믿는다는 것. 그리고 놀랍게도 주민등록증이 아예 없다는 것. 청년의 치아는 다 썩거나 주인에게 구타당해 부러져 듬성듬성했고, 다리에는 하지정맥류가 화산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그 몸으로 그는 2천 마리의 돼지들에게 밥을 주고 똥을 치우느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도 나름대로 불만이 있는 듯했다. “이건 부당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고개를 끄덕였고, ‘죽을 만큼’ 맞은 적이 있음을 토로하는 목소리에는 분노도 배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우리가 주인과 대면하고 청년을 구출해내고자 했던 날, 그는 상식 밖의, 하지만 우리에게는 낯익은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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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들(이 표현을 용서하시기 바란다. 내 짧은 국어 실력으로는 그들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은 참말이지 하나의 예외도 없이 자신이 살아온 참혹한 터전을 떠나기를 거부한다. 전문가들은 일종의 공포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에게는 현재와 비교할 만한 다른 삶의 경험이 없기에, 노예의 일상에서 벗어나는 자체가 공포로 다가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할 거예요?”라는 질문에는 “여기서 일할 거예요”라는 단호한 답이 돌아왔고, “월급도 안 주는데?”라고 찌르면 “언젠가는 줄 거예요” 하는 답답한 방패가 쳐들렸다. 월급 달라고 얘기해본 적은 있느냐는 질문에 청년은 “딱 한 번 있다”고 했다. 농장에 처음 왔을 때였다. 그는 가출 뒤 길거리를 헤매다 흘러들어 왔을지언정 “월급은 얼마냐”고 물을 줄 아는 당돌한 청소년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3년, 그는 “먹여주니까 딴생각 없이” 일하고, ‘주인이 한몫 챙겨주겠지’ 하는 공허한 믿음만 공고한 ‘노예’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어떻게 요즘 세상에 그런 일이 있어? 쯧쯧.” 하지만 그렇게 혀 차는 소음 속에서 나는 종종 비닐봉지를 뒤집어쓴 듯한 갑갑함을 경험한다. 비록 ‘방송에 나올 만한’ 일은 아니라지만 과연 노예란 그토록 별종 같은 존재일 뿐인가 하는 의문이 치밀 때다. 내심 불만이 가득하고 가끔은 술잔 속에 분통을 털어놓다가도 다음날이면 ‘시키는 대로 따르고 주는 대로 받고 항상 복종하며’ 살아가는, 그러면서 ‘언젠가는 잘될 거야’ 하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 너와 나는 노예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을까 하는 자괴감에 사로잡힐 때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 이미 영어를 ‘네이티브’ 수준으로 마스터한다는 으리으리한 아이들과 동네 보습학원에 턱걸이하는 우리 아이들이 ‘경쟁’할 수 있다고 믿고, “평준화가 애들 망쳐요” 하는 소리를 서슴없이 내뱉는 서민 아파트 아줌마 앞에서 말문을 잃을 때다. 그 양순함과 우직함과 순진함이 과연 우리가 찾는 ‘노예’들과 어디가 얼마나 다르랴.
내가 끌어낸 노예 청년은 나온 지 몇 시간 만에 자신이 바보 같았다는 탄식을 했다. 주눅이 들어서 할 말을 못했고 다른 생각을 하는 자체가 두려웠다는 고백도 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난 이후 처음으로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때껏 그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고 대화하는 법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각이었고, 해방이었다. 결국 그를 해방시킨 것은 방송사도 아니고 가끔은 정의의 사도처럼 설쳐대는 제작진도 아니었다. 바로 그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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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민 S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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