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동창 친구들과 만나면 가끔씩 학창 시절의 무용담(?)이 화제에 오른다. 나는 ‘범생이’였지만(!) 왈짜 기질이 있던 친한 친구들도 있었는데, 하루는 유흥가 뒷골목쯤 되는 곳에서 봉변을 당했더란다. 완력이 앞서는 건달들과 시비가 붙은 것이다. 그런데 유독 한 친구가 눈에 띄지 않더란다. 한바탕 곤욕을 치른 친구들이 옷을 털고 있는데, 사라졌던 그 친구가 어디서 구했는지 몽둥이를 하나 들고 나타나서는 이미 떠나가버린 건달들을 향해 호통을 치더라나. 그 친구는 지금도 이 이야기만 나오면 괜스레 변명하는 목소리가 커진다. 지난 11월26일 헌법재판소가 형법의 혼인빙자간음죄에 위헌 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에 그 덩치 크고 말 잘하는 친구가 생각났다.
혼인빙자간음죄는 이미 사문화한 형벌 조항이다. 이 죄목으로 한 해에 몇 건이나 기소될지 궁금하다. 헌법재판소 결정이 난 다음날 아침 각 신문이 이를 대서특필한 것은 ‘오버’한다 싶을 정도다. 어쨌든 대서특필할 뿐 딱히 토 다는 신문이 없는 것을 보면, 이 형벌 조항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여기는 여론이 그다지 없다는 점을 방증하는 듯도 하다. 현실적으로 적용 가능성도 매우 낮고 법전에나마 굳이 존치하자고 목청 높이는 이들도 없는 법이었던 셈. 그렇다면 고민할 게 뭐가 있었을까. 중학교 2학년생 정도면 능히 가늠할 수 있는 판단이 아니었나 싶다. 그걸 대서특필하는 언론이 새삼스러운 아침이었다.
그런데 정작 현실에서 중요한 문제에 부딪치면 헌법재판소는 어디론가 숨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최근 국회의 언론관련법 날치기 통과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보인 태도가 대표적이다. 날치기 통과 과정의 절차적 위법성을 인정하면서도 무효는 아니라고 한 결정은 닭이 모래에 머리를 처박는 것과 흡사한 숨바꼭질 수법이었다. 뒤늦게 헌법재판소 사무처장이 국회에서 “헌재 결정 어디에도 ‘유효’라고 한 부분은 없다”고 말했다는데, 여기엔 중학교 2학년생도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왜 무효라고 하지 않았나요?” 법관은 판결문으로 말한다는데, 재판관은 결정문으로 말하는 게 아니었나?
이번 혼인빙자간음죄 위헌 결정을 보고 여성계는 지난해 10월 간통죄에 합헌 결정을 내린 헌법재판소의 과거를 꼬집었다고 하지만(물론 성적 자기결정권을 옹호하는 논리를 따른다면 이 두 가지 결정은 모순이다), 여기에서 과거 헌법재판소가 보여온 비슷한 행태를 일일이 들춰내 시시비비를 따지기는 싫다. 다만 헌법재판소가 ‘그건 오해다’라고 말하고 싶다면, 단 한 번에 그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바로 사형제의 위헌 여부에 대한 결정이다. 크리스마스이브인 12월24일 헌법재판소가 사형제의 위헌 여부를 가리는 결정을 선고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니 말이다. 이는 59명의 사형수에게 목숨이 달린 문제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인권 수준을 다시 한번 세계에 공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헌법재판소라면 어떤 문제에 대해 사회적 논란이 끝난 뒤 누구나 당연하다고 인정하는 레디메이드 결론에 무임승차하기보다는, 아직 흐릿한 상식의 실체를 닦아 헌법적 원칙을 또렷하게 밝혀 보여주는 선지자적 지위를 자임해야 하지 않을까.
동창생 친구들을 만날 때 저 덩치 크고 말 잘하는 녀석에게 “에라이, 이 헌재 같은 놈!”이라고 욕할 수 없는, 기쁜 크리스마스 즈음이 되기를 기대한다.
*2005년 이후 사형이 ‘집행’된 나라는 다음과 같다.
방글라데시, 벨라루스, 중국, 인도네시아, 이란, 이라크, 일본, 요르단, 북한, 쿠웨이트, 리비아, 몽골, 파키스탄, 팔레스타인, 사우디아라비아, 싱가포르, 소말리아, 대만, 미국,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예멘
*2005년 이후 사형이 ‘선고’된 나라는 다음과 같다.
아프가니스탄, 알제리, 바하마, 바레인, 방글라데시, 벨리즈, 바베이도스, 부르키나파소, 부룬디, 중국, 콩고민주공화국, 이집트, 에티오피아, 가나, 기니, 인도, 인도네시아, 이란, 이라크, 자메이카, 일본, 요르단, 카자흐스탄, 북한, 남한, 쿠웨이트, 라오스, 레바논, 리비아, 말라위, 말레이시아, 말리, 몽골, 모로코, 나이지리아, 오만, 파키스탄, 필리핀,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싱가포르, 소말리아, 스리랑카, 수단, 시리아, 대만, 탄자니아, 트리니다드토바고, 미국,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예멘, 짐바브웨
자료: 국제앰네스티 (2006)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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