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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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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긴 신체 보여주며 “니들도 조심해”


봉건시대 고문과 근대 초 사형제도의 본질은
피지배층의 생물학적인 공포 불러일으켜 저항 의지 미리 꺾는 것
등록 2009-10-01 16:31 수정 2020-05-03 04:25

약 10년 전부터 일각의 국내 사학자 사이에 새로운 유행이 퍼졌다. ‘고종 시대의 재조명’,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고종을 ‘개명군주’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보수적 ‘토종’ 집권자인 고종이 외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개화파보다 더 성공적으로 개혁을 했다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외래 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은 김대중·노무현 계통 개혁파들에게 그때만 해도 크게 밀렸던 정통 극우파의 ‘역사적 명분’을 간접적으로나마 살리려 했던 모양인데, 이와 동시에 “우리 역사에도 메이지유신과 같은 자주적 개혁 운동이 있었다”고 주장해 수많은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열등감도 치유하려 했던 모양이다.

근대 이전 공개된 장소에서의 가혹한 고문과 사형은 피착취자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했고, 이 공포는 모순된 현실을 그냥 참고 넘기도록 하는데 큰 구실을 했다.

근대 이전 공개된 장소에서의 가혹한 고문과 사형은 피착취자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했고, 이 공포는 모순된 현실을 그냥 참고 넘기도록 하는데 큰 구실을 했다.

‘잠재적 모반자’에 불 달군 대꼬치 고문

고종을 마치 보수와 개혁을 잘 맞추어준 통치자의 모델, “자생적 근대를 배양할 수 있는 민본 사상”의 소유자로 그리곤 했던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양심적 유림 매천 황현(黃玹·1855~1910) 선생의 에서 예전에 읽은 영남 유생 이근수(李根洙)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임오군란 때 대원군에게 모종의 계책을 알려주었다가 군란이 진압된 뒤 고향에 내려가 과거에 응하려 하지 않았던 이근수를 고종이 “잠재적 모반자”로 지목해 암행어사 조병로(1816~86)로 하여금 엄준하게 문초하도록 했다. 다음은 매천이 묘사한 그 국문의 본말이다.

“조병로의 성품은 본래 잔혹하였으므로, 이근수 등을 체포하여 상주의 감옥에다 수감하고 그들 일당을 심문하였다. 그는 대꼬치(竹籤)를 불에 달구어 그들의 살을 지지므로 독이 크게 퍼졌다. 이때 이근수가 고함을 지르며 ‘선비는 제각기 뜻이 있는 법이라, 혹 과거를 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니 그것은 묻지 마시오. 그리고 나는 역적 모의를 하지 않았는데 어찌 파당이 있단 말이오? 죽으면 죽었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거짓말로 (중략) 다른 이들을 끌어들일 수 있겠오?’라고 말한 후에 혀를 깨물어 말을 하지 않자 그의 목을 매어 처형했다. 그의 시체를 검시한 결과 대꼬치가 대여섯 개 나왔다.”( 권1)

고종을 ‘개명군주’로 보려는 것은 최근 일부 우파 학자의 경향일 뿐이지만, 1960~70년대부터 한국의 ‘주류’ 사학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적 통치가 “당대로서 상당히 선진적”이라며 종합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해온 것이다. 특히 사법 부문에서 사형과 같은 중형을 내릴 때의 까다로운 절차, 사형에 대한 왕의 필수적 재가 등을 들어 “유교적 합리주의와 인도주의의 반영”이라고 이야기해왔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조선왕조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유교 국가들은 유럽이나 중동의 중·근세 국가에 비해 형정을 관대하게 베푼 편이었다. 전성기인 8세기 초반의 당나라 같으면 약 5천만 명의 총인구에 연간 평균 사형 집행 건수가 30~50건에 불과했다.

그러나 ‘유교적 합리주의’가 꼭 신화만이 아니었음에도 ‘국가 보위’의 문제를 직면했을 때는 불에 달군 대꼬치가 ‘모반자’로 의심받은 이의 신체를 가차 없이 지져야 했다. 이근수처럼 강직해 집권자들로서 위험시하는 인물이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 속에서 고문실에서 죽어야만 그와 같은 처지의 영남 남인들이 불에 달군 대꼬치가 무서워서라도 국정을 마음대로 논하지 않는다는 게 조병로와 같은 노론계 지배자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유럽·중동보다 개명했다는 유교 국가에서도
효수된 김옥균.

효수된 김옥균.

몸을 찢어버리는 대꼬치에 대한 생물적 공포심, 이것이야말로 궁극에 가서 조선왕조의 안전을 담보하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잠재적 모반자’로 의심받은 이의 몸을 대꼬치로 찢어버리면서 그를 천천히, 잔인하게 죽이는 일을 고종은 여느 조선 임금처럼 당연시했다. “고문은 인륜에 거역한다”는 근대적 여론이 독립협회(1896~99) 등을 통해 표명되고 나서도, 고종은 끝내 고문을 완전히 금지하지 않았다. 고문의 남용을- 서구인의 비판 등을 의식해- 1894년 7월9일 금했지만, 대한제국의 마지막 법률집인 1905년의 에서도 범죄 혐의자가 심문 때 자백하려 하지 않으면 하루에 30대까지 곤장을 때릴 수 있게 허락해놓았다. 비록 능지처참 등 과거의 잔인한 사형 방식들을 갑오개혁 때 마지못해 폐지했지만 사형제를 끝까지 적극적으로 이용한 게 고종이었다. 조선의 마지막 전통적 군주라고 할 그에게는 고문과 사형이 왜 이토록 중요했는가? 이는 전통 시대 통치 방식의 근본적 성격과 직결돼 있는 문제다.

위에서 말한 대로 조선과 같은 유교 국가들은 세계사적 시각으로 봐서는 사형이나 고문 남용을 비교적 하지 않는 쪽에 속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인이 사형을 당할 수 있는 이유는 꽤 많았다. 국가에 도한 도전, 즉 ‘모반대역죄’라면 본인이 능지처참당하는 것은 물론 연좌제 논리에 따라 그 아버지와 아들, 그를 은닉해준 친구까지 다 교살형에 처하게 돼 있었다. ‘모반대역’과 같은 극단적 ‘반국가 행동’은 아니더라도 조선 백성에게 ‘죽을 죄’들은 꽤 많았다. 허락 없이 중국이나 일본으로 넘어간 자(월경죄), 관인(官印)이나 돈을 위조한 자, 심지어 귀양 갔다가 도망을 시도한 자들까지도 빠짐없이 사형감이었다. 국가뿐만 아니라 신분제나 가부장제의 논리에 도전한 이들도 많은 경우 죽어야만 했다. 주인을 고발한 노비, 아버지의 비행을 고발한 아들, 주인을 ‘감히’ 욕한 노비, 남편을 구타한 아내, 심지어 사대부 여성과 간음을 시도한 ‘상놈’…. 특별히 ‘정상참작’할 것이 없다면 그들은 죽어야 했다. 물론 사유재산에 대한 심각한 폭력적 도전(강도죄 재범)도 죽임으로 응징되곤 했다. 형이 확정되면 능지처참 등에 처할 정치범의 경우에는, 위의 발췌문에서 보다시피, 심한 고문으로 심문 과정에서 벌써 반쯤 초주검이 되는 일이 파다했다. 만약 정치범이 몸집이 좋고 끈기가 있어 고문을 당해도 죽지 않았다면 혹형(酷刑) 중 하나로서 ‘차열’(車裂)을 당하는 경우가 있었다. 차열이란 수형자의 팔다리를 네 개의 차에 묶어 그 차를 각각 다른 방향으로 몰아 수형자의 사지를 찢어죽이는 형을 말한다. 특히 정치범의 경우에는 참수당한 머리를 ‘효수’(梟首), 즉 말뚝에 꽂아 만백성에게 전시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종합해서 말하자면, 전근대적 유교 왕국의 사형제란 광범위성과 상당한 가혹성(인간으로서 참기 어려운 신체적 통증을 가하려는 경향), 그리고 가시성, 즉 대중적 공포 효과를 겸비했다고 볼 수 있다. 툭하면 ‘인의예지’를 들먹이는 성리학적 지배자들에게 국경을 넘으려는 궁핍한 백성까지 잡아죽이는 포괄적 사형제와 차열 등과 같은 잔혹한 혹형, 그리고 수형자의 머리를 말뚝에 박아 저잣거리에서 보여주는 선혈이 낭자한 쇼들이 왜 그토록 필요했을까?

‘동물적 겁주기’가 동방예의지국 유지 비결?

지배자들이 하나님이나 인의예지를 팔아먹어 그 ‘신성한 권위’를 입증하려 해도, 전근대 사회는 근본적으로 경제외적 착취의 사회일 수밖에 없었다. 근대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잉여가치의 수취란 노동자에게 그 제조품의 판매로 얻은 이윤의 극히 작은 일부분만 월급으로 주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비폭력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경제적 착취지만, 전근대 사회에서는 개별적 영주나 ‘집단적 영주’로서의 중앙집권적 관료국가가 농민으로부터 지대 내지 세곡으로 그 수확물의 상당 부분을 무조건 빼앗았다. 국가 입장에서야 ‘국은에 대한 백성의 보답’이었지만 문맹자가 대다수인 전근대 사회에서는 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피통치 계급에게 손쉽게 내면화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궁핍이 일상화된 내핍경제에서는 많은 경우 국가나 지주의 잉여 수취는 피착취 계층 구성원들을 반아사 내지 아사 상태로 몰아넣기도 했다. ‘잉여’가 별로 없는 흉년에도 착취가 계속됐기 때문이다.

대중적 공포를 통한 저항의식 마비 시도는 동양과 서양이 다르지 않았다. 19세기 초반 미국 남부에서의 흑인 노예 고문장면을 그린 그림.

대중적 공포를 통한 저항의식 마비 시도는 동양과 서양이 다르지 않았다. 19세기 초반 미국 남부에서의 흑인 노예 고문장면을 그린 그림.

빼앗는 자와 빼앗기는 자의 구분이 명확하고 피착취자가 주린 배조차 메우지 못하는 전근대 사회에서 피착취자의 저항은 당연히 예상되는 일이고, 그 저항을 미리부터 방지하는 것이야말로 착취자들의 급선무였다. 저항에 대한 최적의 ‘예방주사’란 바로 고문과 참혹한 처형을 최대한 가시화함으로써 잠재적 반란자들에게 극심한 신체적 ‘아픔’에 대한 생물적 공포를 자극해 그들의 저항 의지를 미리부터 꺾는 것이었다. 생물체라면 불에 달군 대꼬치에 대해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동물적 겁’이야말로 ‘동방예의지국’이 유지될 수 있는 하나의 비결이었다.

전근대 사회의 지배 질서도 불에 달군 대꼬치를 절실히 필요로 하지만, 특히 전근대 사회의 해체 국면과 초기 자본주의 사회 형성 과정에서는 지배자들에게 ‘학살’도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내재적 논리 그 자체야 노골적인 폭력적 수탈이라기보다는 경제적 수탈이지만, 특히 초기에는 무산계급이 돼야 할 일반 대중이 사유재산에 대한 최소한의 도전도 용납하지 않는, 일정한 직업이 없는 이를 비인간으로 취급하는 자본주의적 규율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의 몸에 그 규율을 내면화할 방법이란? 바로 사형제 효과의 극대화다!

1808년 이전의 ‘자본화의 선진국’ 영국에는 죽임을 당해야 할 사죄(死罪)만 해도 약 220종에 달했다. “일정한 직업 없이 집시의 무리와 한 달 이상 같이 어울려 노는 죄”부터 “5실링 이상의 가치에 해당하는 물건을 훔친 죄”까지다. 값이 좀 나가는 손수건 하나를 훔쳤다가 죽어야 하는 세상이다 보니 한 해에 2천~3천 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도 다반사였다. 예컨대 영국 자본주의의 맹아기라고 할 엘리자베스 1세 치세(1558~1603)에 약 8만9천 명의 수형자가 처형됐다. 그때보다 약간 ‘문명화’됐다는 1770~1830년만 해도 좀도둑과 부랑자 등을 포함한 7천 명이 죽어야 했다. ‘신사의 나라’ 영국이었지만 19세기 중반까지 공개 처형은 보통 일이었다. 이렇게 주검 더미를 쌓아가면서 신생의 자본계급은 무산자들을 순치시켰던 것이다.

극단적인 내부 갈등, 즉 내전을 겪게 되는 후발 자본주의 국가의 경우 이같은 ‘죽임을 통한 자본주의적 순치’는 보통 백색 테러, 즉 체제에 대한 저항을 시도하거나 잠재적으로 시도할 수 있는 모든 이에 대한 무분별한 죽임의 형태를 띤다. 자본주의 국가로서 대한민국의 존재 기반을 쌓은 1947~53년의 수많은 양민학살은 궁극적으로 이런 범주에 속한다. “까불면 죽어!”라는 진리(?)를 피착취자가 체득하지 않는다면 제도로서의 근대 자본주의의 성립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선진국서 한 해 수천 명씩 사형

“우리 역사”라고 자랑하려는 욕망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자기 기만을 하지 않는 편이 좋다. 한국이든 어느 나라든 간에 전통 시대 역사란 바로 계급사회의 역사, 즉 ‘잠재적 반란자’의 몸을 불에 달군 대꼬치로 지지는 역사다. 유교든 불교든 기독교든 어떤 아름다운 이데올로기적 이야기라 해도 고문당하는 이의 살이 대꼬치로 지져지는 이 기본적 현실에 대한 가식, 즉 합리화나 은폐, 미화 장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계급사회의 역사란 본질상 잔혹하다. 그 잔혹성을 있는 그대로 봐야 계급이 없는 미래 사회를 언젠가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참고 문헌:

1. 황현 지음, 임형택 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5, 상권, 199~201쪽.

2. 박지태 엮음, 선인문화사, 1999, 제5권, 158쪽.

3. 서일교 지음, 박영사, 1974, 21, 208~213쪽.

4. 김기춘 지음, 삼영사, 1990, 155~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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