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여성 독자께는 미안한 일이지만, 군대 얘기가 가장 적절한 비유일 듯싶다.
병역 의무를 이행하는 기간에는 유독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왜일까?
우선 엇비슷한, 반복되는, 단순한 일과가 한 이유일 것이다. 군대에 갔다온 이들이라면 창의성을 발휘할 기회라곤 찾아보기 힘들뿐더러, 괜스레 창의성을 발휘해 일처리를 했다가는 오히려 상관의 꾸중만 들었던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자기 몸을 편하게 하는 일, 이른바 ‘삐대기’를 위해서만 창의성을 발휘한다.
또한 잠시도 여유를 느끼도록 놔두는 법이 없다는 점이다. 오죽하면, 군대에선 할 일 없을 때 삽으로 땅을 파라고 하고 다 파면 다시 묻으라고 한다는 말이 있을까. 자기 몸을 마음대로 놀릴 수 있는 건 달콤한 꿈나라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다음으로,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돌아오는 게 없다는 철칙이다. 짬밥은 늘 짜인 식단대로 나오고, 월급은 정해진 호봉대로 나오며, 진급은 짬밥 수에 따라 하루의 오차도 없이 이뤄진다. 아주 큰 공을 세우면 특별휴가가 주어지기도 하지만, 이는 로또 당첨 수준이다.
이런 생활이라면 군대에 갔다오지 않은 독자들도 손사래를 칠 게다.
그런 군대 생활을 버티게 해주는 건 무엇일까? 애국심? 아무래도, 일정 조건의 대한민국 남자 모두가 거쳐야 하는, 괜히 회피하려다가는 사회생활에서 불이익을 받는(요즘 고위 공직자들은 꼭 그렇지도 않지만) 의무 사항이니까, 하는 체념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또 하나 꼽자면, 하루씩 지워져가는 달력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제대가 가까워지니까 견디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서론이다. 이제 독자께서는 16쪽으로 ‘점프’해서 이번호 표지이야기를 읽어보시기 바란다.
…
비정규 생산직 공장노동자의 삶을 들여다본 첫 소감은 군대 생활과 똑같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점은? 제대가 없다는 사실이다. 로또라도 당첨되지 않는 한, 그 힘겹고 보람 없는 노동과 빈곤의 악순환에 영원히 갇혀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열심히 일해도 삶이 나아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자각보다 더 절망스러운 게 있을까.
애국심에라도 기대볼까. 하지만 이제는 산업역군 운운하는 입바른 칭송도 사라졌다. 정부도, 이른바 산업화 세대라는 이들도 오히려 노동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내년 최저임금은 올해 4천원에서 겨우 110원(2.75%) 오른 시급 4110원으로 결정됐다. 이는 외환위기를 겪던 1998년 이후 가장 낮은 인상률이다. 노동부라는 정체불명의 조직에서는 비정규직보호법 시행을 앞두고 ‘100만 고용대란설’을 떠들어대며 정규직 전환 시점을 늦춰야 한다고 우기더니, 막상 7월 한 달 동안 비정규직 해고보다는 정규직이나 무기계약으로 전환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나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노동 유연성, 그러니까 노동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는 정도를 높이자는 주장이 자본의 선창을 따라 사회 전체의 신조처럼 굳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일하면서도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워킹 푸어’(working poor) 300만 명이 살아가고 있다. 복지는 ‘권리’임에도 마음대로 줬다 뺏었다 할 수 있는 ‘시혜’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백번 양보하자. ‘가난을 벗어나려면 열심히 일하라’고 요구하는 그들에게 저 300만명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명박 대통령이 틈만 나면 강조하는 ‘서민’이 바로 그들이요, ‘민생’이 바로 그들의 삶 아닌가. 애국심은 개나 줘버리라고 하라.
한쪽에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서도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거나 횡재하는 이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뼈빠지게 일해도 시급 4천원의 ‘막장 노동’을 이어가야 하는 이들이 있다. 선진국처럼 전자의 사람들에게 고율의 상속세·불로소득세를 매기자고 하면 발끈하고 나서는 이들이 있다. 백번 양보하자. 후자의 사람들에게 인간적 삶의 영위에 필요한 만큼의 임금과 안정된 고용을 제도로 보장하는 안전판이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나.
날마다 노동의 바위를 밀어올린 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산을 내려와야 하는 우리 시대 시시포스들이 묻는다.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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