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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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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버스

등록 2009-09-03 18:40 수정 2020-05-03 04:25

1992년 겨울, 광주에서 보낸 고등학교 학창 시절의 끝 무렵이었다. 시내버스 안에 앉아 그 소식을 들었다. 창백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버스 안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얕게 숨을 쉬고 있었다.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 마주 보기를 피하면서 창밖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라디오 소리만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가 정계를 떠난다는 것이었다. 뉴스는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 이제 알겠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겨우 울음을 참고 있었다. 젠장, 겨울치고는 햇볕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햇볕이 차 안으로 쏟아지지만 않았더라도 누군가 울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도 이길 수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라 한구석에 있도록 간신히 허락받은 것처럼 느껴졌다. 결혼도, 취직도, 승진도, 이제 없는 살림을 쪼개 우리끼리 알아서 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억울했다.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사람들은 말을 잃었다.

침묵의 버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침묵의 버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그와 함께 거인의 시대가 사그라지다

1980년 5월, 담양에서 세발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기억이 잘 나진 않는다. 어머니에 따르면, 청년들이 버스에 가득 몸을 싣고 광주로, 광주로 올라갔다 한다. 어머니는 황급히 세발자전거와 나를 끌고 집으로 돌아와 옹크리고 계셨다. 어머니는 아들이 아직 청년이 아니어서 내심 다행이었을까? 광주로 갔다 되돌아오는 시외버스에는 몇 명이나 타고 있었을까? 기억에도 없는데, 담양으로 되돌아오는 빈 버스가 가끔 나타난다. 그럴 때마다 눈물이 난다. 너무 많은 사람이 스러졌다.

그가 정계로 되돌아오고, 약속을 깼다고 주위에서 비아냥댈 때 난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멈추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으리라. 그에게는 있어야 할 자리가 있었다. 그는 침묵 속의 말이었으며, 죽음을 책임진 삶이었다. 그는 내내 모욕에 맞선 의연함이었고, 호전 속의 평화였다. 그는 그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 그와 함께 ‘거인의 시대’가 사그라졌다는 것을 느낀다. 나를 포함해 이제 자잘한 욕망이나 셈하는 삶만이 남아 있는 것 같아 무참하다.

나는 독자들이 이 글의 지역성과 시대착오를 이해해주길 바란다. 1997년 이후 그가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었던 만큼, 그 이전에는 그가 전라도와 특별한 관계였다는 것도 함께 기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전라도를 ‘위해’ 정치를 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가 전라도와 ‘함께’ 정치를 했다는 말이다. 이런 뜻에서, 전라도는 한때 지역이자 정치 조직이었다. 도청을 지키기 위해 시외버스를 타고 모여들고, 시내버스 안에서 절망의 침묵을 공유한 경험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특별한 정치인은 떠났고, 이제 호남 사람들은 누구와 함께 정치를 할 것인지 다시 고민해야 할 때가 왔다.

알다시피 그는 세 가지 지향점을 제시했다. 그런데 그중 하나는 모호하게 남아 있는 것 같다. 동향인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민주주의’와 ‘남북관계’에는 유달리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는 반면, ‘서민 경제’에는 별다른 관점이 없는 경우를 자주 만난다. 민주당과 한나라당도 경제정책에서는 뚜렷한 변별점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호남 사람들의 요구의 본질이, 우리도 저만큼 큰 자동차를 타야 한다는 것이었다고는 믿기 어렵다.

전라도가 ‘사회적 경제’의 모종밭이 되기를

서민 경제의 내용이 혁신적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도 어렵다. 따지고 보면, 최근 민주주의의 파괴도 유권자들의 경제적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나는 전라도가 ‘사회적 경제’나 ‘호혜적 경제’라고 불릴 만한 것의 모종밭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을 민주당이 실천할 수 없다면, 민주당을 버리면서 나아가야 한다. 함께 탄 버스가 저항과 침묵의 지점을 지났는데, 그 버스를 기념관에 보관하기 위해 세워야 한다면, 그것은 너무 안타깝지 않은가.

이찬웅 프랑스 리옹고등사범학교 철학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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