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에 언급한 발리의 일화는 스피노자의 의 한 대목과 겹쳐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비슷하게 쓰이는 두 단어, ‘도덕’과 ‘윤리학’을 구분해야 한다. 들뢰즈의 간단명료한 정식을 빌리자면, “도덕은 우리가 해야 할 것과 관련되고, 윤리학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관련된다”. 도덕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선험적으로 지정해주는 반면, 윤리학과 관련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선험적으로 알지 못한다. 모세가 받은 십계명은 도덕을 형성하지만, 사회적 규율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문학과 예술은 윤리학을 구성한다.
선과 악에서 기쁨과 슬픔으로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은 종교적 명령이 없는 실천 철학이다. 윤리학은 선과 악의 구분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치 평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역량의 증감, 존재의 확장을 예민하게 느끼길 요구한다. 우리는 자신의 역량이 증대될 때 기쁨을 느끼고, 축소될 때 슬픔을 느낀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행동의 기준을 선과 악에서 기쁨과 슬픔으로 이전시키기를 제안한다.
스피노자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정도 교의는 어느 정도 알고 있을 듯싶다. 그런데 좀더 나아가보자. 아무래도 기쁨과 슬픔이라는 기준은 분명하기는 하지만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기쁨의 추구는 쉽게 쾌락주의로 빠지는 것이 아닐까? 간단한 예로 마약 중독에 대해 생각해보자. 마약이 주는 쾌감을 연장하기 위해 점점 더 중독될 때, 그것이 하여간에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좋은 것일까? 앞서 말했지만, 그것이 종교나 법으로 금지됐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여기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얻기 위해 스피노자의 이차적 구분을 살펴보자.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을 다시 하위 단위로 구분한다. 기쁨은 쾌활함(cheerfulness)과 쾌감(pleasure)으로, 슬픔은 아픔(pain)과 우울함(melancholy)으로 나누어진다. 이 구분의 기준은 신체가 변용되는 범위다. 즉, 쾌감과 아픔은 신체의 일부분만 변용될 때이고, 쾌활함과 우울함은 신체의 전체가 변용될 때이다. 마약은 신체의 일부분에만 제한적으로 기쁨을 주기 때문에 그것은 쾌감일 뿐 충만한 기쁨이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피노자가 쾌감과 아픔에 이중적인 가치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쾌감은 기쁨에 속하기는 하지만 나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국소적인 쾌감을 주는 사물에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픔은 슬픔에 속하기는 하지만 좋을 수도 있다. 앞서 말한 집착에서 풀려나도록 도와줄 수 있을 때 그렇다. 그러니까 순간이 아니라 지속적인 시간 안에서 봤을 때, 아픔은 쾌활함을 형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윤리학의 목표는 기쁨의 형성이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해, 전체적이고 지속적인 기쁨, 즉 쾌활함의 형성이다.
잃어버린 쾌활함을 찾아서
발리의 일화에서 아이의 불만족은 교육적 효과가 있는 아픔에 상응한다. 아이는 부모의 신중한 상호작용 안에서 쾌활함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베이트슨의 관찰이 정확하다면, 이러한 문화 형식이 몇몇 사람의 특별한 지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 안에서 전승되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발리의 음악 또한 점층적인 기승전결 구조를 배제하고, 같은 모티브가 변주되고 반복된다. 발리의 음악을 듣다 보면, 언젠가 한국의 라디오에서 들었던 멜로디가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아, 였던가. 시작도 끝도 없이 완만하게 진행되는 노랫가락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
한국의 사회와 문화가 최근 10여 년간 절정의 쾌감을 추구하며 급속하게 변형돼왔다는 점을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강렬하고도 평평하게 지속되는 쾌활함을 유지하는 법은 ‘잃어버린 소리’와 함께 사라져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다시 새롭게 구축할 수 있을까.
이찬웅 프랑스 리옹고등사범학교 철학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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