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사진 한겨레 자료
일주일의 묵언수행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3천 배가 남았다. 1989년 1월 화엄사 대웅전 계단을 오르다 말고 지리산에 지는 석양을 봤다. 하늘이 푸르면 석양이 붉다. 시린 겨울 바람이 푸르게, 그러다 붉게 대웅전 앞마당을 쓸었다.
나는 재가불자수행단체의 고등부 회원이었다. 소속 사찰은 없었고, 모시는 스님도 따로 있진 않았다. 주로 20~30대 청년들이 매주 모여 마음 공부를 품앗이했다. 용맹정진의 기운이 대단했다. 철마다 절에 들어가 수행했다. 예불, 108배, 좌선, 운력, 그리고 다시 108배로 하루를 보냈다.
막내였던 나는 첫날부터 묵언수행을 자처했다. 딱 한 번 말을 했다. 새벽 하늘에 별이 무수했다. “아, 별.” 곁에서 신발 신던 처사님이 그걸 들었다. 모른 체해주셨다. 마지막 날 저녁, 3천 배를 하는 데 꼬박 12시간이 걸렸다. 나이 든 보살님들은 사나흘씩 걸리기도 한다. 그 시절 나는 젊었다.
108개 염주를 하나씩 헤아리길 30차례 하고 대웅전을 나왔다. 무릎이 펴지지 않아 걷지 못하고 기었다. 그저 미소뿐인 부처님께 합장하고 나오는데 대웅전 앞마당이 괴괴하다. 밤새 눈이 내렸다. 맑았던 하늘에 눈구름이 왔다가 이제 막 걷혀 해가 뜨고 있었다. 하얗게 쌓인 눈 위에 푸르고 붉은 아침 해가 번졌다. 아무도 걸어간 이 없는 눈밭을 기면서 나는 울고 싶었다. 울었다.
진리를 ‘느꼈다’. 알지는 못하겠으나 알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주지 스님이 계율과 법명을 주셨다. “새 세상을 만드는 전륜성왕이 이 땅에 오시면 그걸 사람들에게 알리는 꽃이 핀다. 그게 우담바라다. 우담이 되거라.” 일주문을 나설 때까지 묵언을 깰 수 없었다. ‘우담, 우담.’ 속으로만 되뇌었다.
새로운 세상이 오고 있다는 희망을 전하고 싶은데, 내가 쓰는 기사에는 그런 조짐조차 없다. 알 것만 같았던 진실은 20년 사이에 훌쩍 멀리 달아나버렸다. 눈과 귀를 씻고 화엄사에서 묵언수행을 하고 싶다.
안수찬 기자 blog.hani.co.kr/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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