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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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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알게 될 걸 지금 알고 있다면

등록 2009-05-20 10:39 수정 2020-05-03 04:25

그는 한 나라의 대법관이었다. 법조인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는 후배 법관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법의 권위와 정의를 지키는 보루로서 명예로운 대법관 생활을 마치고 박수 속에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그런데 사달이 났다. 대법관이 되기 전 법원장으로 있을 때 정치색 짙은 재판에 개입한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피고인의 보석 허가를 자제하라든가 위헌심판 제청이 있었음에도 재판을 속행하라고 종용했기 때문이다. 후배 법관들이 잇따라 회의를 열고 불신임 뜻을 밝혔다. 대법원장으로부터 엄중 경고를 받은 뒤였다.
그는 비록 한때 판단이 흐려져 돌이키지 못할 과오를 저지르긴 했지만 역시나 타고난 법관이었다. 그 나라의 헌법은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는 법원장이 후배 법관들의 재판에 이런저런 의견을 개진한다는 것은 이미 ‘독립적인 재판’에 대한 침해임을 아프게 인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자리에 연연하는 건 그 나라 사법부 전체에 대한 불신을 키울 뿐이란 걸 또한 아프게 인정했다.
자리란 얼마나 무겁고도 가벼운 것이던가. 청년 법관 시절부터 그토록 열망하던 자리건만, 고통스런 성찰을 거친 뒤엔 한 꺼풀 미련도 없이 버려야 할 멍에였다. 그는 법관 선서를 하던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평생 소중하게 간직한 법전 속의 두 글자 ‘양심’을 머릿속에 그리고 또 그리며 남아 있는 번뇌를 털어냈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말수 적고 점잖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유서 깊은 도시였다. 그곳에서 ‘프로보노’(pro bono) 활동을 시작했다. 라틴어로 ‘공익을 위하여’라는 뜻인 프로보노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사회적 소수자를 위해 보수를 받지 않고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변호사들의 공익 활동을 뜻한다. 그는 그 나라에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프로보노의 모범 사례를 만들어 보였다. 해박한 법률 지식과 뛰어난 통찰력으로 담당하는 공익소송마다 승승장구했고, 이웃한 도시에서까지 그의 도움을 구하러 온 이들로 사무실 앞은 늘 장사진을 이뤘다. 대법관까지 지내고도 영리를 추구하는 변호사로 개업하거나 대형 로펌에 들어가 ‘전관예우’라는 단 꿀을 빠는 이들이 여전히 있는 그 나라에서 그의 활동은 놀라운 결단이자 예상 못한 성공이란 평가를 받았다.
물론 한때의 과오에 대한 참회의 성격도 있었지만, 그런 간난신고를 새로운 차원의 법률가 인생으로 승화시켰다는 게 더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가슴 막히는 분노로 그를 탄핵했던 후배 법관들도 마음을 열게 됐다. 뜻있는 법관들이 퇴임 뒤 그와 한솥밥을 먹거나 다른 지역에서 그의 실험을 뒤따랐다. 훗날 기록에 그는 오랜 권위주의를 깨고 낮은 곳으로 임하는 풍토를 법조계 전반에 확산시킨 인물로 소개됐다. 재판 개입 사건은 그의 인물평에서 한두 줄 이상을 차지하지 않았다.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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