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이언 브래디(Ian Brady)라는 연쇄살인범이 있다. 1960년대 5명의 어린이를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99년부터는 정신병원에 수감됐는데, 자살할 권리를 달라며 단식투쟁을 벌여 또 한 차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2000년 1월 그가 단식 도중 검사를 받기 위해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는 과정을 영국 언론들이 취재했고, 차창의 커튼이 열린 틈으로 그의 얼굴을 찍은 사진이 보도됐다. 브래디는 프라이버시가 침해됐다며 해당 언론들을 상대로 언론중재 신청을 냈다.
결과는 어땠을까. 물론 패소했다. 하지만 영국 신문·잡지사들의 자율기구인 언론중재위원회(Press Complaints Commission)가 그런 결론에 도달한 과정을 주목해볼 만하다. 제소당한 신문사들이 “브래디는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그 형이 확정됨으로써 이미 모든 프라이버시권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반박한 데 대해, 위원회는 동의하지 않았다. 유럽인권협약에 따라 만든 위원회의 자율규약은 “모든 사람”에게 프라이버시권을 주고 있으며, 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예외는 아니라는 취지였다.
위원회는 이런 대전제 아래 좀더 세밀한 판단 기준을 갖고 있다. △사진이 공공장소에서 촬영된 것인지 △공공의 이해와 관련된 사진인지 △촬영당한 이가 자신의 문제를 공공의 쟁점으로 만듦으로써 사실상 기사화되는 데 동의한 셈인지 △그가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한 적극적 조처를 취했는지 등이다. 5이 경우, 브래디는 자살할 권리를 얻기 위해 단식을 하고 이런 사실을 언론에 알리기도 하는 등 사회적 주목을 스스로 끌어왔다는 점이 지적됐다. 흉악범이고 형이 확정됐다는 단순한 이유가 아니었다.
언론에 다뤄짐으로써 초상권이나 사생활, 명예 등 권익을 침해당하더라도 이를 감수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공적 인물들이다. 보통 사람의 팔을 꺾는 건 범죄행위이지만 경기 규칙에 동의하고 출전한 격투기 선수의 팔을 꺾는 건 용인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신을 공공의 영역에 위치시킴으로써 언론의 주목에 동의한 셈이기 때문이다. 또 공적 인물은 언론에 대한 접근이 보통 사람보다 쉽다. 반론을 펼 수도 있고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반박 자료를 만들 수도 있다. 물론 언론의 보도가 아무리 공적 인물을 다루더라도 단순한 호사 취미를 위한 것이어선 안 된다는 전제가 깔려야 한다.
연쇄살인범의 경우, 이언 브래디를 향해 영국 언론들이 말했던 것처럼 살인을 저지른 순간 모든 권익을 포기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의 죄상과 범행 동기, 특별한 성장 배경, 범행 수법 등은 응분의 처벌이나 유사 범죄 방지라는 공익을 위해 공개돼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그의 무고한 가족까지 신분을 노출시킬 수 있는 자세한 신상정보나 얼굴까지 공개해야 할까. 이는 어떤 공익을 위한 걸까.
이런 미묘한 사안들에 대해 진지한 성찰이 뒤따를 것이라는 조건 아래 보자면, 언론 보도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점점 더 큰 공간을 마련해주려는 (보수 언론을 포함한)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 반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런 자유는 1차적으로 정치인과 공무원 등 가장 원초적인 의미의 공적 인물이 관련된 사안에서 더 넓게 확장돼야 한다는 점만 노파심에서 덧붙여둔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2007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BBK 의혹을 보도한 를 상대로 이명박 대통령이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낸 것이나 서울중앙지법이 2월6일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린 것은 시대를 역행해도 한참 역행하는 일이다. 대통령 후보를 검증하는 일에는 더없이 소심해지고 흉악범 얼굴을 공개하는 데는 전광석화처럼 과감한 언론이 이 시대의 요구라는 말인가. 그런 언론이 득세하는 나라에서 표현의 자유는 끔찍하게 살해당할 뿐인 것을.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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