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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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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죽음

등록 2009-02-04 10:12 수정 2020-05-03 04:25

연초부터 참담한 죽음의 소식이 갈마든다. 서울 용산에서 철거민과 경찰관 6명이 떼죽음을 당한 일로 설 연휴가 심란했는데, 이제 애먼 여성 7명의 생명이 한 연쇄살인범의 손에 유린됐다는 뉴스가 머리를 멍하게 만든다. 이 두 가지 사건에는 확연한 공통점과 미묘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공통점은 물론 목숨 여럿이 부당하게 앗겼다는 사실이다. 생명의 소중함이 묵살되고 있다는 점이다. 법질서가 파괴됐다는 점이다. 법질서의 오래된 원형인 고조선의 8조법이나 함무라비 법전, 모세의 십계명 등 어느 것을 보나 그 제1원칙은 우리 헌법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명은 존엄하다’가 아니던가.
차이점은 연쇄살인극이 치안 공권력의 사각지대에서 한 비정상적 개인에 의해 저질러진 반면, 용산 참사는 그 치안 공권력의 능동적인 작전 과정에서 빚어졌다는 사실이다. 전자에 견줘 후자가 훨씬 통제 가능한 상황에서 일어난 구조적 비극이라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책임을 가리는 문제는 전자에 견줘 후자가 훨씬 복잡하고 추상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법질서의 제1원칙에 유념한다면 두 사건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문제는 이 원칙을 어긴 책임을 묻는 방식과 태도다. 각 사회는 돌로 쳐죽이든 전기의자에 앉히든 총살을 하든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살리든 그 문명의 수준에 맞게 고안된 방식으로 처벌을 하게 된다. 또한 명확한 형법적 인과관계가 증명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치적·도의적 책임이 있으면 마땅한 응징을 하거나 스스로 죄인을 자청하는 게 또한 인지상정이다. 흉악범의 부모가 자식의 죄를 부끄러워하는 일이 그런 예다. 그렇기에 형법상 책임만 따지면서 그 이상의 조처는 여론의 향방에 따라 결정하겠다거나 자신의 초라한 자존심 지키기와 연계하겠다는 건 무뢰한이나 할 법한 발상인 것이다.
는 그 미묘한 차이점이 실상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맹자가 “사람을 죽이는 데 몽둥이로 죽이는 것과 칼로 죽이는 것이 차이가 있습니까”라고 묻자 양혜왕이 대답했다. “차이가 없습니다.” 맹자가 “칼로 죽이는 것과 정치로 죽이는 것에 차이가 있습니까”라고 묻자 양혜왕이 대답했다. “차이가 없습니다.”(양혜왕 장구 상)
연쇄살인범과 용산 참사의 정치적 책임자는 동급이라는 얘기일 터. 동급으로 취급받지 않는 길은 하나다. 죽음을 무겁게 여기는 모습을 보일 일이다. 임신 초기 태아의 생명도 소중히 여겨 낙태라면 진저리를 치는 서구의 보수주의자들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마저 죄악으로 여기는 기독교인들처럼, 진심으로 생명을 무겁게 여길 일이다. 사람이 죽으면 21g이 줄어든다는 허황한 영혼의 질량 측정처럼, 죄없이 스러져간 영혼들을 가볍게 보내선 안 될 일이다.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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