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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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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인간

등록 2008-11-12 10:13 수정 2020-05-03 04:25

로맹 가리의 소설을 읽다가 ‘루뭄바’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군인들이 루뭄바의 머리채를 붙잡고 강제로 무릎을 꿇리고 있는 그 유명한 사진이 그곳에 있다는 걸 그제야 비로소 알아보았다….” 이야기 전개에서 중요한 사실도 아니고 그저 화자의 심리를 묘사하는 짧은 문단이었다. 역자는 루뭄바가 ‘아프리카 민족주의 지도자, 콩고 민주공화국의 초대 수상’이라는 간단한 각주를 달아놓았다.
파트리스 루뭄바. 1950년대 아프리카 콩고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민족해방·통합 운동에 뛰어든 젊은이 루뭄바는 1960년 해방된 콩고의 초대 총리가 되어 식민지배자였던 벨기에 국왕이 참석한 독립 기념식에서 일갈한다. “우리는 흑인들이 자유로워지면 어떤 일을 이룰 수 있는지 온 세상에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불안한 정정 속에서 그의 비서 출신으로 군 지휘권을 쥐고 있던 조제프 모부투가 미국과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가택 연금됐다 탈출했으나 다시 붙잡힌 루뭄바는 군인들에게 머리를 쥐어뜯기는 등 굴욕적인 폭행을 당했다. 이 장면이 외신을 타고 전세계에 알려진 ‘그 유명한 사진’이다. 그 뒤 루뭄바는 또 다른 정적의 손에 넘겨져 처형됐고 이후 주검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 유명한 사진, 아니 그의 이름조차 내겐 왜 생소할까. 물론 40년도 더 지난 일이어서도 그렇겠지만, 로맹 가리가 프랑스 작가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프리카를 식민지배한 경험이 있던 유럽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과 지식의 차이에도 원인이 있을 것 같다. 하기야 우리가 아프리카의 역사에 바친 호기심이란 게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유럽과 신대륙의 역사, 즉 백인의 역사를 무대 중앙에 올려놓은 우리의 교육과정과 미디어에 둘러싸여 있다 보면, 흑인의 역사에서는 노예사냥과 식민지배, 독재와 쿠데타, 인종청소 따위의 음울한 이미지컷 몇 장밖에 건질 게 없다. 노예로 팔려가던 조상들이 고개 숙이고 지나던 해안가 요새의 굴다리 밑에서 구멍난 메리야스 차림으로 하릴없이 뒹굴며 낯선 외국인들에게 불만의 눈길을 보내고 있던, 서부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의 빈민들이 주던 느낌 말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인은 이 행성 최초의 인간이며, 역경을 딛고 모든 대륙으로 뻗어가 현생 인류의 씨를 뿌린 종족이다. 기원전 800~500년 콩고 분지에서 아프리카 전역으로 퍼져나간 종족의 이름 ‘반투’(Bantu)는 ‘인간’을 뜻한다고 한다. “얼마나 매혹적인 생각인가!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맨 먼저 자기가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의 역사는 기록되고 전달되지 않았을 뿐, 다른 인종의 역사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식민지배와 전쟁, 개발의 근현대사에서 그들에게도 김구와 이승만이 있었고 박정희와 김영삼·김대중이 있었으리라. 내전으로 폐허가 된 시에라리온에서 만난, 역사의 상처와 현재의 빈곤을 어떻게든 넘어서 새로운 세상을 앞당겨오리란 열정에 불타던 흑인 시민운동가들의 피부는 열대의 태양처럼 빛났다. 인류의 전진은 피부색과 무관하게 지구 어디에서나 한 걸음씩 이뤄지고 있다는 믿음으로 인류는 살아간다.
버락 오바마의 미 대통령 당선도 그런 발걸음의 하나다. 그래서 미국 대선 결과에 주목하는 이유가 단지 그가 흑인이기 때문이어선 안 된다. 미국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에 커다란 파열구를 냈다는 점은 물론 뜻깊지만, 그런 소수집단 출신으로서 인류 전체의 역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가치와 열정과 힘이 그에게 체화돼 있을 것이란 기대가 더 큰 열광의 이유일 것이다. 평화롭고 공평하고 아름다운 미국, 나아가 그런 지구촌의 미래가 그에게 진실로 절실한 꿈인지가 앞으로 오바마 미 대통령에 대한 미국인 그리고 세계인의 지지 기준이다. 물론 그건 좀더 두고 봐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미국의 ‘좌파 언론인’인 매튜 라이스의 ‘삐딱한’ 할렘 르포를 표지이야기로 삼은 것은 그런 이유다. 오바마를 보는 다양한 시선 가운데 어느 것이 흑인의 역사와 인류의 전진에 관한 진실에 가까운지, 우리는 앞으로 4년 동안 담대함과 희망을 품고 지켜볼 일이다.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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