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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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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싸움

등록 2008-11-06 14:46 수정 2020-05-03 04:25

‘변호사짓’을 해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충격도 많이 받지만, “쉽게 풀렸을 사건인데, 괜히 변호사들이 개입해서 사건이 복잡해졌다”거나 심지어는 “변호사만 없었으면 더 빨리 석방될 수 있었는데…” 이런 말이 단연 으뜸이다.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그런 기막힌 오해를 받는 것이 억울하기도 하지만,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이니 혹시 정말 그런 것이 아닌가 불현듯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원칙적으로야 변호사가 조력을 하면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됐으면 됐지 해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변호인이 선임됐다고 괜히 한 번 더 불러서 조사를 하고, 결국 똑같이 집행유예를 받더라도 무죄를 다투느라 더 긴 시간을 구치소에서 보내야 하는 일이 아주 없지는 않다. 싹싹 빌고 빨리 마무리지을 수 있는 일도, 변호사가 법리를 다투느라 재판이 길어질 수도 있다.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어쩔 수 없이 현실적으로는 당사자를 후회하게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함께 비판하고 돌아오는 길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13년 동안 잘 다니던 호텔에서 노동조합을 만들어 휴가를 달라고 했다가 용역업체가 바뀌면서 혼자만 고용승계가 안 된 L호텔의 메이드 노조 지부장, 민주노총에서 처음부터 이렇게 오래 걸릴 것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면 노조에 가입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E사 노조원, 임금이 안 올라도 좋고 정규직 안 되어도 좋으니 계약직으로 복직만 하게 해달라는 H은행 여직원…. 이들뿐이겠는가. 굳이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아도, 재판에 지고 나서 차라리 이렇게 재판으로 끝까지 가지 않고 회사와 중도에 합의했더라면, 중간에 재판부에서 일정한 금액을 받고 조정하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들었더라면 하는 눈빛을 마주치면, 과연 끝까지 좋은 결론을 얻기 위해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이 맞는지 회의가 든다. 무엇보다 노동사건은 자신의 몸을 움직여 일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고, 그렇게 사람들의 ‘먹고사는’ 일이라 더욱 조심스러웠다.

KTX 여승무원 문제가 2년을 넘어가고, 지난해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랜드 조합원들이 아직도 일터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렇게 계속 마음이 불편했다. 그 사람들이 잘못된 법과 제도, 세상을 향해 싸우고 있을 때, 집회나 토론회에서 철도공사를, 노동부를, 못된 사용자를 비판하는 일은 쉽게 함께했지만, 돌아올 수 있는 따뜻하고 안락한 사무실이 있는 나와는 달리, 그 사람들에게는 언제, 어떤 결실이 있을지조차 불확실했다. 나중에 그들이 이 지루한 싸움을 돌아봤을 때 후회하거나 원망하지 않을까, 늘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기륭전자 조합원들이 생명을 건 단식을 할 때, 고공 철탑 위에 올라갔을 때, ‘찌라시’ 신문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경찰의 호위를 받는 용역 깡패들에게 맞고 끌려갈 때, 가슴이 먹먹했지만 계속 자신이 없어 보고만 있다. 지난 10월 마지막 주말 25일도 그랬다. 그날은 기륭전자가 생산라인을 대부분 접고 새 사옥으로 이사를 마치는 날이었다. 그 사람들 모두, 그날의 싸움도 어떻게 끝날지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다는 것도, 아무도 모른다는 것도. 하지만 그 사람들은 모두 그날 싸우러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직접 보지 않은 사람은 믿을 수 없는 94일이라는 시간을 곡기를 끊어 병원으로 실려가고, 동료 조합원을 병으로 잃고, 노동조합을 무기로 돈을 뜯어내는 사람으로 매도당해오면서 버틴 시간들이, 차마 물러설 수 없게 했다. 그리고 지난 1160여 일이 그랬듯이, 앞으로도 비켜서지 않을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이 ‘우리 시대 비정규직의 초상’이라고 입으로만 흥분하면서 걱정만 하고 있는 사이에도. 우리 사회가 이 정도 갈등을 해결하는 조정 능력도 갖추지 못한 채 서로 편을 갈라 삿대질만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중상이나 하는 와중에도.

질 줄 뻔히 알면서도

문득 이제는 우리 곁에 없는 한 선생님의 경제학 수업이 생각났다. “왜 이제는 아무도 공부하지 않는 비주류 경제학만 가르치느냐?”는 질문에, “삼국지의 주인공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되물으셨다. 선생님은 그 대답을 이렇게 하셨다. “나는 제갈량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 유비가 이기지 못할 것을, 질 줄을 뻔히 알면서도 그 사람을 따라갔기 때문에.”

질 줄 알면서도 싸우는 사람들이 있는 한, 서투른 응원으로 일을 그르칠까 걱정만 하지 말고,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조금은 기운을 내보자.

김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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