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풍이 살짝 들었을 때였다. 지난해 10월27일 일요일. 당시 박병원 우리금융 회장은 기자들과 함께 산행길에 올랐다. 충남 계룡산이었다. 갑사로 가는 등반 코스. 박 회장은 그날 똑딱이 디지털 카메라를 갖고 왔다. 단풍이 곱게 물들었거나 풍광이 멋진 곳을 만나면 어김없이 멈춰 찰칵찰칵 셔터를 눌렀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1963년부터 부모님의 구형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뒤, 카메라는 그의 오래된 친구가 됐다.
박 회장은 달변가다. 영어·일어·중국어 등 6개 국어를 한다. 술술 얘기를 하며 산에 올랐다. 계룡산은 돌산이었다. 등산을 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한텐 무척 힘든 코스였다. 하지만 박 회장은 산을 참 잘 탔다.
산을 타고 내려온 뒤, 점심 자리에서 박 회장은 기자들이 묻는 질문에 솔직담백하게 답했다. 우리금융은 민영화를 앞두고 있었다. 이 때문에 기자들은 금산분리에 대해 물었다. 금산분리는 산업자본(재벌)이 금융자본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법적으로 제한한 것을 말한다. 박 회장은 “실익 없는 이데올로기 논쟁”이라며 금산분리 완화에 선을 그었다. 그는 “세계적으로도 산업자본이 은행을 소유한 사례가 없다. 법보다 더 강력한 것이 국민 정서인데, 법적으로 금산분리가 완화된다 하더라도 삼성이나 LG가 은행을 인수할 수 있겠느냐. 정치권의 금산분리 폐지 논란은 실익이 없어도 표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벌이는 이데올로기 논쟁일 뿐”이라고 말했다. 기자들은 다음날 그의 말을 신문에 실었다. 박 회장은 지난 6월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등산 모임으로부터 꼭 1년가량 지난 10월13일, 정부는 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소유한도를 현행 4%에서 10%로 늘리는 것을 뼈대로 한 금산분리 완화 방안을 내놓았다. 시급한 금융위기에 대처하기보다 엉뚱한 일에 나선다는 비판이 나온다.
박 수석은 청와대에서 경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통한다. 참여정부 때 박 수석은 재경부 차관이었다. 투기 억제에 초점을 맞춘 부동산 정책에 대해 그는 공급 확대를 주장하며 비판의 각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금산분리에 대해 입을 닫고 있다. 그의 달변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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