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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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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들

등록 2008-08-26 00:00 수정 2020-05-03 04:25

▣ 박용현 한겨레21 편집장 piao@hani.co.kr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의 자진 사퇴 뒤 후임으로 거론되는 이들 가운데 한 명이 눈길을 끈다. 페미다 미르자 하원의장. 무샤라프의 퇴임을 이끌어낸 집권 연정의 한 축인 파키스탄인민당(PPP) 쪽에서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인데, 그는 지난해 암살당한 부토 전 총리처럼 여성 정치인이다.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에서 여성 정치인들이 이토록 두각을 나타내는 건 뜻밖이다.
알고 보니, 파키스탄 하원의 342석 가운데 73석(약 21%)을 여성이 차지하고 있다. 60석은 아예 여성에게 배정돼 있다. 주의회들에서도 전체 758석 가운데 128석이 여성 몫이고, 그 아래 단위의 지방의회들에서는 3분의 1을 여성에게 할당하고 있다.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여권 선진국’의 외형을 갖췄다.
게다가 2006년 여성보호법 제정으로 악명 높은 ‘후두드 법령’도 폐지됐다. 이슬람법 샤리아를 그대로 답습해 1979년에 만들어진 이 법령은 간통한 여성은 돌로 쳐 죽이도록 규정하는가 하면, 여성이 성폭행 혐의를 입증하려면 삽입 행위에 대해 증언할 성인 남성 4명을 증인으로 세우도록 했다.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이 이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무고죄와 간통죄로 처벌하는 등 여성에게 너무나 가혹한 법이었다.
그러나 형식적 지표와 제도가 파키스탄 여성의 실제 삶을 대표하는 건 아니다. 보수적인 종교 지도자들과 부족장들은 여전히 여성의 정치 참여를 막고 있으며, 일부 지역 정치 지도자들의 합의로 여성이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일도 빚어진다. 지난해엔 펀자브주 정부의 여성 복지부 장관이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불만을 품은 암살범에게 살해된 일도 있다.
뿐만 아니다. 지참금 등의 문제로 가정 폭력이 빈번히 일어나는데, 여성에게 등유를 뿌리고 불을 붙여 숨지게 한 사건이 지난해 34건이나 보고됐다. 여성에게 염산을 뿌려 상처를 입히는 일도 흔한데, 병원에서 피해 여성을 받아주지 않아 정확한 통계도 내기 어렵다고 한다. 심지어 정조를 잃은 여성을 남편이나 남자 친척이 살해하는 ‘명예 살인’ 관습도 없어지지 않고 있다.
여성 총리를 배출하고 여성 하원의장이 의사봉을 쥔 나라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니, 참 그로테스크한 나라다.
그럼, 우리나라는 어떤가. 대권을 잡은 여성은 아직 없으나 대권에 도전해본 여성은 있다. 단지 국회의장이나 부의장을 해본 여성이 없다는 점은 파키스탄보다 못하다. 전체 299명 의원 가운데 여성의원이 41명(약 13%)이니 비율도 상대적으로 적다. 여성 몫으로 배정된 의석은 아예 없다.
하지만 역시 이런 형식상 지표로 그 나라 여성의 지위와 인권 현실을 다 들여다볼 수는 없다. 우리나라엔 샤리아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최근 벌어지고 있는 구체적 현상들이 더 유효한 판단 잣대가 될 수 있을 법하다.
한나라당 소속인 서울 중구 의회 의원들이 집단적으로 성매매 추문에 휩싸였다. 지난 총선 기간에 정몽준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방송사 여기자를 성희롱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는데, 당시 정 최고위원을 비판하는 집회를 연 이들이 최근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여성단체들은 선거법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을 했다. 역시 여기자 성추행 파문으로 한나라당을 떠났던 최연희 의원은 지난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뒤 은밀히 복당을 모색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연행된 여성들은 경찰서 유치장에서 브래지어를 벗도록 강요당했다. 이명박 대통령 소유의 건물 지하에 여종업원이 술시중을 드는 유흥업소가 입주한 것도 오래된 논란이다.
세계를 번쩍 든 장미란 선수의 조국,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세계인들은 참으로 기괴하다고 여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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