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초기작 는 2차대전 뒤 독일인의 원죄 하나를 아주 예민하게 드러낸다. 바로 엊그제까지 나치 체제에 찬동하면서 히틀러 집단이 벌였던 유대인들에 대한 인종 청소와 각종 악행에 적극 혹은 암묵적으로 동조하던 것이 대부분의 독일 시민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전쟁이 패전으로 끝나고 연합군이 진주하자 돌연 남김없이 나치 저주자들로 변한다. 이러한 기억의 의도적인 변조 혹은 날조가 몇 명의 사람들이 한두 세대에 걸쳐서 벌이는 일이라면 오를까 채 1년도 되지 않는 기간에 몇 천만 명의 규모로 벌어진다면 사실 양심의 결이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차마 견디기 힘든 일일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이 집단적 사기극을 생눈 뜨고 보는 고통에 못 이겨 일부러 히틀러 추종 세력을 자처하여 스스로를 파멸시켜버린다.
벗겨지는 민주화의 금박
멀리 독일에서의 일만이 아니다. 1987년 전과 후를 기억하는 이라면 비슷한 일이 한국에서도 벌어졌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87년 6월28일 저녁까지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는 ‘폭도’였고 운동의 맨 앞에 서 있었던 세력은 ‘좌경 용공’이었다. 방송에 신문에 주류 종교 집단 등 모든 기성 세력들은 운동 세력이 ‘4·19와 같은 순수함을 잃고 정치적·이념적으로 변질’되었고 ‘불순한 배후 세력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고 질타해 마지않았다. 그러다가 6월29일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직선제 수용 발언을 하자마자 갑자기 사회 전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좌경 용공 세력’은 졸지에 ‘민주화 운동 세력’이 되었고, 군대의 투입이 논의될 만큼의 ‘사회 불안’은 갑자기 ‘6월 항쟁’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얻어 쓰게 되었다.
당시 갓 대학에 들어갔던 나는 이 하루아침에 벌어진 거대한 위선에 참을 수 없는 구역질을 느꼈다. 내 눈에 비친 진정한 어둠의 세력은 전두환도 노태우도 아니었다. 그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대충 시류에 흘러가면서 자기 등가죽이나 따땃하게 챙기면서 어디 한 자리 한 숫가락 생길 일 없는지나 기웃거리는 저 익명의 ‘사회 지도층’ 분자들. 진보가 되었든 보수가 되었든 자신이 믿고 신봉하는 가치나 원칙 따위는 웃음거리로도 여기지 않는 자들. 이 한국 특유의 ‘사회 지도층’들이 혁신되지 않는 한 일껏 성취한 민주화도 언제 떨어져나갈지 모르는 얇은 금박에 불과하다는 불길한 느낌이 십수년 전 민주화가 시작되던 시점의 나의 느낌이었다.
지금 그 금박이 떨어져나가기 시작한다. 한국방송 이사회 6인방은 007 흉내를 내며 ‘메뚜기 이사회’를 연다. 촛불 미사를 주도했던 한 가톨릭 사제는 느닷없는 안식년을 맞게 되었다. ‘747 성장’이라는 포복절도할 만한 엉터리 공약(空約) 앞에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침묵을 지킨다. 검찰은 엉뚱하게도 미국 노사 관계의 태프트-하틀리 법을 들어서 보수 신문 광고주 압박 운동을 하던 시민들을 기소했고, 여기에 사법부도 손을 맞잡고 그 시민들의 구속 영장을 발부하였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3년간의 쟁의 끝에 50일이 넘는 단식에 돌입하자 회사 쪽은 ‘단식이라는 극한 수단은 업무 방해’라는 기발한 논리로 형사 고발을 한다.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길거리에 모이기만 하면 시위대 머리당 ‘마일리지 인센티브’를 내걸고 무술 유단자 임시직 경찰들을 동원하여 잡아들인다. 일제시대를 찬양하고 민족 해방 운동을 공공연히 폄하하는 자들이 ‘시대정신’이라고 나선다.
사회 지도층의 보신책, 양비론
나는 궁금하다. 이 총체적인 민주주의의 후퇴에 즈음하여서도 아직 입장을 밝히지 않은 ‘사회 지도층’ 분자들은 앞으로의 5년을 어떻게 버틸 생각일까. 아마 이러한 것일까. ‘이명박 정권도 문제가 많지만 촛불집회도 변질되었으므로 반드시 진압되어야 하며, 민영화나 대운하도 문제가 많지만 다른 대안도 없는 것이 문제이며….’ 바로 80년대 여론 지도층의 보신책으로 애용되던 ‘양비론’이라는 것이다.
지난해 말 이명박 후보 당선 직후 이 지면에 쓴 칼럼에서 나는 “가두에서 다시 뛰어야 할지 모르니 운동화의 흙을 털어두자”고 했었다. 그 말이 단 몇 개월 만에 현실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운동화의 흙은 지난 몇 달간 광화문을 누비며 다 털려 나갔으니 이제 어디의 흙을 털어야 할까. 우리 각자의 신념과 가치에 묻은 흙을 털어둘 때가 아닐까. 거창한 것 아니라도 좋다. 이 ‘웬수 같은’ 대한민국에서 몇 십년씩 끼여 살면서 그래도 이건 정말 아니라고 저건 정말 지켜야 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 하나씩은 있지 않은가. 그것만이라도 간직하고 날을 세워서 말해야 할 때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우리의 21세기도 45년 독일이나 87년 한국과 달리 뭔가 발전이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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