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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넌센스] 꼼꼼한 놈, 국민에겐 쓸모없는 놈

등록 2008-08-07 00:00 수정 2020-05-03 04:25

▣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요즘 ‘놈놈놈’이 유행이란다. 김지운 감독이 만든 영화 덕분일 게다. 그런데 한 일간지에 “독한 놈, 꼼꼼한 놈, 따뜻한 놈”( 8월1일치 섹션 1면)이란 제목이 등장했다. 이른바 ‘동아 기자의 DNA’란다. “여러 언론사 기자들이 모여 언론의 오보 사태에 대해 얘기하다 한 타지 선배가 그러더군요. ‘동아가 쓴 기사는 팩트 확인이 가장 꼼꼼해 그냥 받아도 문제 없더라’” “촛불집회 기사를 분석했더니 뜻밖에도 기사가 팩트가 가장 충실한 것으로 드러났다” 등 자화자찬도 이어졌다. 실제 기자의 DNA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송파구 문정동 로데오 거리 상점들이 촛불시위가 시작된 뒤 많게는 80%까지 매출이 떨어졌다”고 보도했다가 평범한 대학생이 확인 작업으로 오보임이 드러나 망신살 뻗쳤던 언론사가 어디였더라? 또 이 오보를 지적하는 보도가 나오자 “전적으로 촛불시위 때문에만 어렵다고는 말 못하지만”이라는 문구를 슬그머니 집어넣어 사실관계를 왜곡해가며 반박에 나선 기자가 어디 기자였더라? 독하고, 꼼꼼하고, 따뜻한 기자여서 그랬던 것일까. 아 참, 요새 누리꾼들이 애용하는 ‘놈놈놈’은 따로 있단다. “미국엔 착한 놈, 일본엔 예의 바른 놈, 국민에겐 쓸모없는 놈.”

대통령 사촌 처형이 공천을 빌미로 30억원을 받았단다. 놀랄 일이지만, 사실 권력기관에 있는 친인척을 호가호위해 돈을 뜯어내는 일이야 종종 일어나고 더구나 이번엔 청와대가 직접 검찰에 넘긴 것이라니,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러다 우연히 를 봤다. 원고지 2~3매 분량의 ‘청와대 한 점 의혹도 안 남기려 검찰 넘겨’라는 제목의 해설 기사는 맨 하단에 찌그러져 있었다. 내용도 “김씨 측이 받은 돈 30억원 중 25억여원을 돌려줬고, 실제 공천 로비를 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 “김윤옥 여사와 평소 왕래가 없었고” 등 청와대 관계자의 발언을 상세히 소개한 정도였다. 그러다 갑자기 옛일이 떠올랐다. 참여정부 시절 권양숙씨와 권씨의 20촌인 청와대 행정관을 ‘가까운 관계’로 규정하고 대서특필했던 일 말이다. 당시 보도는 누리꾼들 사이에 ‘20촌 놀이’(예를 들면 ‘나 얘랑 많이 친하다’를 ‘나 얘와 20촌 사이야’로 표현하는 놀이)를 유행시키며 큰 재미를 줬는데, 이번엔 너무 조용해 아쉬울 따름이다.

이 졸지에 불온 잡지가 돼버렸다. 국방부에서 금서로 지정했다는 23개 불온서적 가운데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에 연재했던 글을 모은 가 포함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서 목록’이 보도된 뒤 해당 도서들의 판매량이 배 이상 증가하고 인터넷 서점에서는 ‘국방부 선정 불온서적 23선’ 독자 이벤트까지 벌이고 있다니, 국방부에 대한 고마움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러고 보니 10년 전 군복무 시절도 떠오른다. 내부반 책꽂이에는 노란색 표지의 라는 두툼한 책이 꽂혀 있었더랬다. 막심 고리키의 .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사회주의의 이념이 초로의 여인을 투쟁으로 이끌었다는 내용을 담은 ‘운동권 서적’이다. 하지만 부대 간부들 가운데 이 책의 정체를 파악할 능력이 있는 이는 없었다. 덕분에 이 책은 표지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오랫동안 사병들의 사랑을 받았더랬다. 여러모로, 국방부에 감사했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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