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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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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0일 ‘국민주권’의 날

등록 2008-06-10 00:00 수정 2020-05-03 04:25

▣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지난 5월31일 시청 앞에 모인 10여만의 시민들은 드디어 청와대로 행진하기로 결정했다. 한 갈래는 남대문으로, 다른 한 갈래는 소공동을 돌아 종각에서 경복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인 서울 시내, 갑자기 이들 눈앞에 텅 빈 하늘이 나타났다. 공사 중인 경복궁 담이 보였고 그 위에는 바로 북악산의 능선과 검은 밤하늘만이 펼쳐져 있었다. 600년이 넘도록 조선조의 궁궐, 일제의 총독부와 관저, 대한민국의 청와대 등 한반도에 군림하는 지배세력들이 복작거리는 서울의 저잣거리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자신들을 깃들여왔던 공간이다. 그런데 시위대가 광화문 넘어 이 공간까지 진출한 것은 600년간 최초로 벌어진 일이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600년간 고요하고 그윽하게 멈춰 있던 이 하늘 위로 시위대의 소리는 가차 없이 울려퍼진다. “이명박은 물러나라.”

우린 신비스런 존재가 아니다

그날 밤 우리 머릿속에서 몇 개인가의 매트릭스가 산산조각 깨져나가는 경험을 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난 2주간 한국 사회의 변화는 분명히 어딘가 전인미답의 지경으로 나아갔고, 이제 두 달 전의 세상과 앞으로 펼쳐질 세상은 같은 것이 될 수 없다는 직감은 우리의 머리 위에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지금 움트고 있는 한국 사회의 새로운 역동성의 근본적 의미가 단지 ‘광우병 쇠고기가 싫다’ 하나만이라고 생각할 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600년간 편히 자고 있었을 북악산 산신과 그 앞자락의 지신을 두드려 깨운 지난 2주간의 꿈틀거림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드디어 적극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주권’의 담지자임을 스스로 깨닫고 선언한 사건이 아닐까. 물론 이 ‘국민주권’이라는 말은 생겨난 지 몇백 년도 더 되었고, 지구상의 거의 모든 나라의 헌법 맨 앞을 장식하고 있으며, 심지어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도 나오는 진부한 명제다. 1968년 파리 혁명에서는 ‘쾌락의 해방을!’과 같은 새롭고 ‘섹시’한 구호가 나왔다. 그런데 2008년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한국의 이 새로운 사태에서 전면에 등장한 구호는 기껏 이 심드렁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명제인 것이다.

이미 동학에서 3·1운동과 4·19혁명, 광주민중항쟁과 6월항쟁에 이르도록 사람들은 이 땅의 궁극적인 임자가 자신들임을 확인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에만 나타났던 움직임이었다. 물론 위험천만의 미국 쇠고기로 온 나라가 뒤범벅이 되는 것도 결코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지만, 일제 강점, 대학살, 독재 타도와 같은 문제와는 그 규모가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정도로 나라 전체가 크게 결딴이 나야만 비로소 소처럼 꾹 참고 묵묵히 살아오던 사람들이 성난 황소로 돌변해 나라를 엎어놓는 것이 우리가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보아온 낯익은 패턴이었다. 그런데 세기가 바뀐 다음부터 사람들이 모이는 빈도와 강도와 그 주제의 성격을 생각해보라. 2002년에는 미선이 효순이를 위한 촛불이 나왔고, 2004년에는 탄핵 반대 촛불이 나왔다. 그리고 2008년에는 다시 광우병 쇠고기를 두고서 수만 명이 밤과 낮을 이어가며 시위를 벌이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푸른 바닷속 깊이 모비딕 고래처럼 숨어 있다가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만’ 모습을 드러내는 신비스런 존재가 아니다. 가엾은 여중생이 되었건, 발칙하기 짝이 없는 국회의원들이 되었건, 무능하고 교활하고 폭력적인 정부가 되었건, 이 나라의 임자가 자신들이라는 자존심과 주인 의식을 건드리는 일이 벌어지면 걷잡을 수 없이 밀려나오며 아무도 자신들을 통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21년 전과 지금의 외침

본래 ‘국민주권’이라는 말은 그 ‘국민’이라는 행동의 주체가 구체적인 실체로서 나타나지 않는 한 추상적인 공염불이 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원칙은 지난 200년간 이 추상적인 ‘국민’을 앞세워 오히려 지배세력이 사람들을 농락하는 장치로까지 타락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 말이 심드렁한 죽은 어구가 되어버린 바 있었다. 하지만 2008년 5월 한국에서는 ‘국민’의 실체가 낮밤을 이은 집단 행동으로서 현저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6월10일에 100만 명이 모일지 몇 명이 모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21년 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나왔던 기껏 ‘호헌 철폐 직선제 쟁취’의 외침은 이제 ‘모든 권력은 우리로부터 나온다’로 변모했다. 그날 눈앞에 보일 머릿수가 얼마가 되었건, 6월10일은 우리 역사상 드디어 ‘국민주권’이 명실상부하게 북악산 앞자락으로 왕림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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