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해정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지난 세월 참 고단했다’ 푸념이라도 했더라면 조금은 덜 미안했을 것을. 대안이라는 말, 타협이라는 말, 실리나 실용이라는 말을 앞세워 ‘이 정도면 됐다’며 싸움 접자던 사람들의 말이 ‘사무쳤다’ 했더라면 덜 부끄러웠을 것을. 잊지 않고 찾아와줘 고맙다며 반갑게 맞이해주어서, 많은 이들 때문에 행복한 싸움을 하고 있다며 환히 웃어주어서 더욱 미안했다. 도망치듯 농성장을 나서며 한참을 울었다. 서러웠다. 울면서 투쟁할 순 없지 않냐던 그네들의 웃음이. 서러웠다. 1천 일이 되기 전에 일터로 돌아가고 싶다며 싹둑 자른 머리카락이. 서러웠다.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끝 모를 투쟁이. 참 서러웠다.
200명 싸움은 10여 명으로
매출 1700억원, 당기순이익 220억원이라는 중소기업 기륭의 신화는 파견 노동자들의 눈물과 한숨 위에 세워졌다. 생산직 직원 300여 명 중 파견직 노동자만 250여 명이건만, 회사 쪽은 파견직 노동자들을 투명인간 취급했다. 눈길은 고사하고 인사조차 받지 않았다. ‘남의 집 살이 간, 쓸개 다 빼고 하는 것’이라 다독이며 일해도 월급은 최저임금 기준보다 겨우 10원 많은 64만1850원에 불과했다. 매달 70~100시간의 잔업과 특근을 마다하지 않고 일했지만, 여성이기에, 파견직 노동자이기에 월급봉투는 항상 남성보다, 정규직보다 얇았다. 기혼자는 출산 때문에 3개월, 미혼자는 결혼 때문에 6개월짜리 계약서를 받아들어야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버티고 싶었던 건, 가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는 열심히도 잘랐다. 건의사항을 말했다고 해고했고, 아파서 병원에 간다고 해고했다. 오늘은 무사히 보냈다며 특근까지 마치고 회사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휴대전화 문자로 ‘더 이상 나오지 말라’며 해고를 통보했다.
그렇기에 노조를 만들고 파업을 시작한 건 선택이 아니었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자신이 일회용 소모품이 아님을,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2005년 7월에 시작된 싸움은 세 번의 봄을 지났다. 공장 점거부터 단식, 삭발, 농성, 삼보일배까지 해볼 건 다 해봤다. 회사 철문에 쇠사슬로 몸을 묶어보기도 했고, 구조물에 올라 고공시위도 해봤다. 구사대에게 머리채를 잡힌 것도, 고소와 고발, 손해배상 소송을 당해 경찰서와 법원을 드나든 것도 수십 차례. 어설펐던 팔뚝질이 익숙해지고 입 안에만 맴돌던 구호가 씩씩해지면서, 힘겨운 투쟁도 웃으며 맞이할 수 있는 투사가 됐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진 게 없다. 회사는 요지부동이고, 200명으로 시작한 싸움은 10여 명으로 줄었다. 회사 쪽의 회유와 협박, 휘청거리는 삶의 무게에 많은 이들이 떠나갔다. 미안해서 차마 ‘어렵다’는 말, ‘오늘이 마지막’이란 말도 못하고 철야농성까지 다 마치고 작별인사도 못한 채 떠나간 사람들. 때로는 섭섭하기도, 아쉽기도 했지만 들리는 소식에 콧등만 시큰해진다. 대부분 구로공단 또 다른 사업장에서 죽어라 일하고, 해고당하고, 내쳐지기 때문이다. 해서 싸움을 멈출 수가 없다. 사람답게 일하고 사람처럼 대우받는 것이 정의이기에, 우리마저 물러서면 다른 노동자들의 희망이 꺾이기에, 기륭은 오늘도 싸운다. 그렇게 KTX 승무원들이 800일을 싸우고 있고, 그렇게 뉴코아·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이 300일을 훌쩍 넘기며 외롭고 참담한 싸움을 계속한다.
무한경쟁, 우리는 무엇과 싸우나
하지만 그들은 또한 우리와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변에 노동자 한 명, 비정규직 한 명 없는 이 없건만, 바로 그 자신이 그러하건만 남의 일처럼 터부시하는 우리와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한경쟁의 시대, 내가 이기지 못하면 죽으니 피도 눈물도 없이 뛰어야 한다는 개똥철학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안 될 거라는 패배감, 나라도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며 질끈 눈감아버린 이기심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연대보단 정책과 대안을 운운하며 관전평만 내놓는 운동 사회와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투쟁이 한창일 때 밀물처럼 밀려들다 한순간 썰물처럼 빠져나와 무용담처럼 읊조리는 나의 식어버린 열정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물을 닦고, 마음을 새로이 다진다. 다시금 싸울 게다. 세상은 내가 변해야 달라지니, 이제 그들의 고통이 아닌 동지가 되어 함께 나설 거다. 동참하시라! 혁명에, 새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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