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한국 학생들의 살인적인 수업량은 모두 알고 있는 바이다. 고등학생은 물론 심지어 초등학생까지도 아침에 나가 학교와 여러 학원을 전전하다가 깊은 밤이나 돼서야 인생의 고뇌를 가득 담은 표정으로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너무나 낯익은 풍경이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 ‘0교시 수업’ 도입에 학원 24시간 수업 허용 등 흉흉한 소문이 돌아다니고 있다. 학교와 학원이 무슨 편의점인가. 학생들은 환한 전등 아래 잠도 못 자고 알만 까는 양계장의 암탉인가. 이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은 것도 당연하지만, 나는 모럴리즘보다는 이러한 관습의 효율성에 더욱 관심이 간다. 수업을 많이 들으면 과연 그에 비례해 학생의 머리가 더욱 깨고 똑똑해지는가.
시간만 무한정 때려박자?
몇 년 전 스웨덴에 갔을 때 스톡홀름대학의 학생 활동가들과 두어 시간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20살을 갓 넘긴 그 젊은이들은 스웨덴 정치와 경제의 역사, 노동운동과 사회복지 시스템의 논리와 한계점, 그것의 급진적 해결 방식에 대해 해박한 지식은 물론 보통 책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창적인 견해까지 술술 풀어놓았다. 대화 도중에 엉뚱하게도 내 머리에 자꾸 어른거렸던 것은 서울 대치동 길가에 주욱 늘어선 각종 학원이었다. 그곳에서 온종일을 보내는 한국 학생들은 기껏 오후 3시면 학교에서 돌아오는 같은 나이의 스웨덴 학생들에 비해 일생 동안 교실에 앉아 수업을 받는 시간이 모름지기 두세 배는 족히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대학생들이 지금 내 눈앞에서 막힘없는 영어로 지식과 생각을 풀어놓는 이 젊은이들에 비해 응당 ‘두세 배’는 똑똑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 자명한 현실은 모르쇠한 채 ‘경쟁력’이니 ‘학력 향상’이니 하면서 계속 수업 시간만 늘려서 가엾은 학생들을 아주 잡고자 하는 생각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펄 벅의 소설 를 보면, 어린 아들을 서당에 보내는 아버지가 훈장님에게 신신당부하는 말이 나온다. “이 아둔한 놈의 머리에 글자를 넣으려면 그저 한없이 때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르신, 부디 매를 아끼지 마십시오.” 지금 같으면 비웃음을 사거나 자칫하면 호되게 경을 칠 이런 생각이 그 시대에는 지배적인 ‘교육’의 패러다임이었나 보다. 상급자가 일하는 이들을 그저 쥐어패는 것이 고작이던 농경시대 생산관계의 지배적 패러다임을 옮겨온 것인 셈이다. 이제 세상이 산업시대로 바뀌었다. 이제 뵘바베르크의 생산이론처럼, 노동(학생의 머리)과 토지(학원과 학교의 교실)라는 기본 요소를 놓고 거기에 ‘시간’만 무한정 때려박으면 얼마든지 원하는 생산물(학력과 좋은 대학)을 얻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이 시대의 지배적인 교육 패러다임이 된 셈이다.
사람의 머리는 인간이 아는 것들 중 가장 미묘하고 예측 불능의 존재이다. 필요한 원자재에다 시간만 때려박으면 그게 생산이라는 생각은 댐이나 운하, 빌딩, 공장 등을 세우는 경우에나 적용된다. 청소년의 머리를 깨우고 지성과 감성을 발달시켜 스스로 생각할 줄 알게 하는 일은 ‘영혼의 산파술’이라고까지 불리는 까다롭고 지난한 작업이다. 그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아이들의 지적·감성적 상태를 머리와 가슴으로 깊이 이해해야 하고, 그 속에 숨은 향상과 발전의 가능성을 극대로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을 주의 깊게 찾아야만 한다. 그런데 이 섬세한 작업 대신 삽질 혹은 ‘공구리’ 치던 가락을 살려 무작정 학생들을 건축현장 원자재처럼 이리저리 ‘조져’대는 일이 벌어지면, 원하는 교육은 성취되지 않고 대신 학생들의 머리만 실제로 ‘공구리’처럼 단단해질 공산이 크다.
돌 세대가 돌 세대를 재생산
하지만 어쩌겠는가 싶다. 이런 식의 작태를 교육과 학력 강화라고 믿는 이들의 면면과 언행을 보니 그들 자신이 지난 시절 이 무지막지한 20세기식 생산함수가 지배하던 60~70년대를 거치면서 그렇게 머리를 ‘공구리’로 만든 이들이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석녀’(石女)라는 옛말에서 보듯, 원래 돌은 동서를 막론하고 새끼를 낳지 못하는 것의 대표적인 심상으로 등장하는 존재였다. 이제 2008년 한국에서는 그 반대로 돌 세대가 돌 세대를 재생산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30년간 스웨덴이 학문, 사회운동, 문화·예술, 국제정치 등에서 배출한 인물들의 수와 한국이 배출한 인물들의 수를 한번 생각해본다. 참고로 스웨덴의 인구는 900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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