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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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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록 2008-02-22 00:00 수정 2020-05-03 04:25

▣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기자는 무엇으로 사나요?’
기자 생활 4년차인 초년 시절에 한 대학생 모임에서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상당히 거창한 존재론적 물음인데, 그때 제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답은 이랬습니다. “반골 기질이오. 삐딱이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15년 전의 일을 떠올려보니, 약간은 젠체하며 유치한 답변을 한 것 같아 쑥스러워집니다. 그런데도 ‘반골’이란 단어가 지닌 강한 끌림은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합니다. 권위나 권세, 세상의 풍조 따위에 타협하지 않고 맞선다는 것은 기자, 곧 언론인의 특별한 권리이자 상징인 때문입니다. 주류보다는 비주류를, 높은 곳보다는 낮은 곳을 지향하며 권력을 감시하는 파수꾼 역할을 부여받았기에 ‘제4부’라는 거창한 칭호마저 붙여졌을 겁니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미국에서는 언론이 무엇인지 탐구할 목적으로, 시카고대학 총장이었던 로버트 허친스를 책임자로 하는 특별위원회가 구성된 적이 있습니다. 이 허친스 위원회가 1947년 내놓은 보고서 (Free and Responsible Press)은 언론의 책무로 ‘사회적 책임’을 으뜸에 둡니다. 사회적 책임이란 파수꾼의 일과 다름없을 겁니다.
하지만 2008년 한국의 언론에선 위와 아래 양쪽에서 제4부의 역할이 동시에 무너지며 파수꾼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언론사 사주가 권력과 기업 등 ‘가진 자’의 편에 선 것이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런 편향성을 견제했고, 견제해야 하는 기자들마저도 권력의 품 안으로 너무 쉽게 날아드는 데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탄생과 4·9 총선을 앞두고 넘쳐나는 ‘폴리널리스트’는 그런 위기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폴리널리스트는 정치(politics)와 언론인(journalist)의 영어 단어를 합성한 신조어로, 언론계의 성취를 바탕으로 정·관계에서 고위직을 얻으려는 언론인들을 지칭합니다.
언론인의 정치 참여 자체가 무조건적인 비난의 대상은 아닙니다. 직업 선택의 자유는 차치하고라도, 언론 현장에서 쌓은 경험이 현실정치에서 플러스로 작용한다면 좋은 일일 터입니다. 그렇지만 얼마 전까지 공정성을 제1의 가치로 내세우던 이들이 돌연 권력을 다투는 정치 세계의 어느 한편에 선다면 그 윤리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특히나 그들 대부분이 권력을 감시·견제하는 쪽이 아니라, 권력을 누리고 지키는 집권세력 쪽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은 언론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키울 수밖에 없습니다.
반골이 사라져가는 시대, 제 자신과 주위를 둘러보며 질문을 던져봅니다. 기자는 진정 무엇으로 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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