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나라를 온통 들쑤시는 ‘영어 열풍’이 단편소설 한 편을 다시 펼쳐들게 했습니다. 전광용의 1962년 작품인 . 그해 동인문학상을 탔습니다.
소설은 1950년대 후반께를 시간적 배경으로 삼아, 이인국이라는 인물을 통해 현대사의 한 단면을 풍자합니다. 외과의사인 이인국은 일제 강점기에는 친일파, 해방 직후의 북쪽에선 친소파, 6·25 전쟁으로 월남한 이후엔 친미파로 변신하며 영화를 누립니다. 그에겐 도덕성이나 신념 같은 ‘가치’는 애당초 관심 대상이 아니며 그저 시류를 타는 데 골몰할 뿐입니다. 그를 가리키는 ‘꺼삐딴’은 영어 ‘captain’에 해당하는 러시아어로, ‘까비딴’이라는 원래 발음이 와전되어 ‘꺼삐딴’으로 통용됐습니다. 소설은 제목에서부터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약삭빠르게 헤쳐온 기회주의적 지식인의 속성을 드러냅니다.
책을 덮고 나니 반세기 전 한국 사회의 풍경이 묘하게 2008년의 오늘과 겹쳐 보입니다. 생존과 출세를 위해 영어와 미국에 몸부림치는 이인국처럼 우리 사회가 ‘영어, 영어, 영어’에 몰두하고 있는 탓입니다. 대통령 당선자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아침 인사를 “굿 모닝”으로 나눠도 그다지 이의를 달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어느샌가 ‘영어’는 이명박 정부의 제1 화두가 됐습니다. 가히 ‘영어 입국(立國)’론이라 불러도 좋을 듯합니다. 고등학교만 마치면 어지간한 실용영어는 구사할 수 있고, 연간 15조원에 이른다는 영어 사교육 시장은 획기적으로 줄어든다는 청사진이 제시됩니다. 영어만 잘하면 ‘G7’에도 성큼 진입할 듯합니다.
한데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헛꿈을 꾸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우선 우리 아이들 가운데 어느 정도의 의사소통을 위해 영어를 배우는 경우는 없습니다. 더 좋은 대학으로 가는, 더 나은 직장을 얻는,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관문’이기에 영어에 몰두합니다. 영어가 현대판 ‘신분제도’의 징표로 작용하는 한, 영어 몰입 사회를 피할 길은 없습니다. 지금 사방에서 들리는 사교육 시장의 환호성이 이를 쉽게 입증합니다.
더욱이 영어는 국가 경쟁력 그 자체와도 거리가 있습니다. 앞으로 10년, 혹은 20년 동안 우리를 먹여살릴 동력은 21세기 지식경제 체제에 걸맞은 과학기술이나 문화 같은 것들입니다. 지나치게 영어에 매달리다 보니 정작 국가 경쟁력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실종됐습니다.
얼마 전 가수 신해철이 영어 정책을 대놓고 비판해 화제가 됐습니다. “우리나라 5천만 명 중에는 평생 영어를 쓸 일이 없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람에게까지 영어를 강요하는 것은 막대한 자원 낭비다. 차라리 미국의 51번째 주로 들어가든지 오스트레일리아처럼 영연방이 되든지, 자진해서 식민지가 되면 될 것 아닌가.”
그의 발언에 감정적이고 지나친 측면은 있지만, 영어 광풍 속에서 언뜻언뜻 21세기판 ‘꺼삐딴 리’들의 모습이 비칠 때면 고개가 끄덕여지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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