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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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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부리지 좀 마라”

등록 2008-01-11 00:00 수정 2020-05-03 04:25

▣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이번 대선의 ‘시대정신’이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이 지난 몇 주간 여기저기에서 숱한 알코올과 니코틴의 제물로 바쳐졌던 듯하다. 이 엄숙한 질문 앞에 내놓기는 좀 그렇지만, 험한 부산말로 “씨부리지 좀 마라”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토론공화국?

“언어는 세계를 창조한다”고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배운 기억이 있다. 실제로 그랬다. 1987년 이전에는 군홧발과 칠성판이 세계를 창조했지만, ‘민주화’ 이후 그 사물들은 세계를 창조하는 마력을 잃고 말았다. 민주화란 아마도 ‘말로 세계를 창조하는 정치 체제’를 뜻하는 것이라는 공감이 확산되었고, 그래서 92년에 들어선 김영삼 정부는 스스로를 ‘문민’(文民) 정부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군 출신들과 그들에게 충성하는 잘 길들여진 관료 집단이나 고시 출신 말고도 무언가 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정부에 대거 기용되기 시작했다. 우선 유명 대학의 교수들이 여의도와 청와대에 대거 영입되는 일들이 벌어졌다. 김대중 정부에 들어서면 그러한 교수들만이 아니라 이른바 ‘비정부기구’(NGO)라고 하는 단체들도 상당한 발언권과 파급력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말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민주화’ 시대의 ‘시대정신’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흐름은 노무현 정권의 흥망기에서 아마도 그 절정을 이루지 않았는가 싶다. ‘토론의 달인’ 노 대통령 본인부터 시작해 정권과 그 주변의 어떤 인사들도 글 한 바닥 말 한 자락 풀어놓는 능력이 없는 이가 드물었다. 게다가 때맞추어 정치적 인프라로 등장한 인터넷의 도움으로 그야말로 대한민국은 ‘토론 공화국’이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실제로 그랬던가? 지난 5년, 아니 15년간 대한민국은 토론 공화국이었던가? 수많은 언설이 쏟아진다고 해서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는 형국이라 할 수는 없다. “언어는 세계를 창조한다”는 명제에는 중요한 단서가 숨어 있다. 세계가 실제로 창조되기 위해서는 그 언어의 내용을 놓고 단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팔다리로 동의한 사람들이 땀 흘려, 몸뚱이 움직여 자기 환경을 실제로 바꾸어내야 한다. 언어는 귀신일 뿐이다. 언어가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홀려야만’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 귀신에나 홀리지 않는다. 건강한 사람들은 서낭당에서 밤을 새워도 머리 풀어헤치고 입에 피 흘리는 처녀의 모습을 보는 법이 없다. 오로지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뚱이와 가슴과 머리의 맥박과 설렘과 흐느낌에 주파수를 맞춘 귀신만이 사람을 홀릴 수 있게 된다.

나는 도사가 아니기에 지난 15년간 이른바 ‘개혁 진보’ 세력이 쏟아놓은 온갖 언설들이 그러한 귀신이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그런데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실천하는 경제 대통령’을 내걸었던 이명박 후보를 일편단심 지켜주어 이번 대선을 초장부터 결말까지 ‘콜드게임’으로 만들어놓은 사람들의 마음은 그간 쏟아졌던 이 말잔치의 15년에 대해 진저리를 치는 듯하다. 어떤 이는 자기가 말만 풀어놓으면 사회적 소임을 다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건 귀신이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사람이며 이 땅에 귀신이란 없다. 우리가 귀신이 아닌 사람인 이상 쏟아놓은 말에 대해서는 몸으로 또 몸을 담은 다른 진실한 반성과 혁신으로 어떻게든 책임을 지고 A/S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귀신’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눈길과 개다리소반의 탁주, 재수없으면 소금 바가지뿐이다. 그 개다리소반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그만 좀 씨부려대고 꺼져라.”

무책임한 언설의 귀신들

이 글은 결코 누구를 비난하는 글이 아니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지난 몇 년간 별로 읽어주는 사람은 없었어도 여기저기에 ‘글질’을 했던 축의 하나라서 이 글은 바로 내 코를 향해 날아드는 비판이기도 하다. 그저 이런저런 무책임한 언설의 귀신들에 지치고 절망한 사람들에게 드리는 어쭙잖은 사죄의 말씀이며, 또 나부터 그리고 우리 모두 이제 다시는 그렇게 무책임한 언설만 풀어놓고 ‘민주화’라고 우겨대는 꼴불견을 만들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해 ‘각서’(覺書·memorandum) 삼아 써본 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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