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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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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서기 공화국을 끝내자

등록 2008-01-11 00:00 수정 2020-05-03 04:25

한국인 생존술의 원형… 우선적으로 개혁하지 않는 한 사상누각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요즘 언론매체에 ‘줄’이라는 단어가 난무한다. 줄대기, 줄서기, 줄세우기 등 줄에 죽고 줄에 사는 한국 사회의 이면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언젠가 감사원은 공직자들의 정치권 줄서기를 상시 감찰하겠다고 했고, 한나라당 지도부는 당 의원들에게 대선 주자들에게 줄서기하지 말라고 공개 경고를 하기도 했다. 서야 할 줄이 확실하게 결정된 지금은 줄대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서울증권 주가가 갑자기 오른 이유

한국 사회의 줄대기, 줄서기, 줄세우기 관행은 대부분 코미디 소재감이다. 아니 코미디 그 자체다. 그렇지만 당사자들은 모두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고 심각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대선 보름 전인 12월5일 서울증권 인사팀의 전화통에 불이 났다고 한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딸이 그 회사에 합격한 게 맞느냐”는 문의전화가 폭주해 직원들은 하루 종일 업무를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나. 사실무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소문이 퍼지면서 그날 주식시장에서 서울증권 주가는 갑자기 4% 이상 치솟았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밝은 주식투자자들은 줄의 위대함을 잘 알고 있기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리라.

줄서기를 하는 이들은 쓸개 없는 비겁한 사람들인가? 그렇게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한때 한나라당에선 줄서기 안 한 의원은 ‘천연기념물’이라는 말까지 나왔으며, 이런 사정은 범여권도 비슷했다. 유권자가 뽑은 의원들을 싸잡아 쓸개 없는 비겁한 사람들로 몰아봐야 누워서 침뱉기가 아니고 무엇이랴. 어느 의원은 “줄서기는 공천 탈락 가능성을 염두에 둔 일종의 보험”이라고 말했는데, 줄서기는 오랜 세월 내우외환에 시달려온 한국인의 학습효과에 의한 생존술의 원형이라고 보아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는 공개적으론 줄서기에 대해 비판적이다. 은 “언론이 제 역할을 저버리고 특정 후보 줄서기에 골몰하는 짓이 통용되는 우리 현실의 후진성이 참담하다”고 했는데, 더욱 참담한 건 특정 후보 줄서기에 앞장선 신문일수록 정치권의 줄서기를 강하게 비판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하는 줄서기는 명분과 소신에 따른 것이지만, 네가 하는 줄서기는 탐욕과 파렴치의 결과라고 보는 걸까?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이, 한국은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줄 공화국’이다. 꼭 부정적인 뜻으로만 하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단어인 일사불란(一絲不亂)은 줄을 설 때에 가능하지 않은가. 긍정·부정의 차원을 떠나 ‘줄 공화국’은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표현한 별명이라는 걸 인정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초강력 중앙집권체제를 대변하는 ‘서울 공화국’ 개념이야말로 전국이 서울에 줄을 서는 ‘줄 공화국’을 말해주는 게 아닌가.

언론이 서울 중심적 보도를 하느라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방에서 벌어지는 각종 선거에서 후보들이 가장 열성적으로 외치는 구호는 “서울에 나 줄 있소”다. 이게 유권자들에게 가장 잘 먹혀든다. 서울에서 고위직 하고 나서 어릴 때 떠나온 고향에 내려가 국회의원·도지사·시장·군수 등을 할 수 있는 비법이 여기에 있다. 중앙 고위직 경력이 없는 사람은 당선되면 서울에 가서 살다시피 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운다. 물론 이게 먹혀드니까 내세우는 공약이다. 지방자치? 아니다. 줄 자치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현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거나 공개적으로 논의하길 꺼린다. 대통합민주신당과 친노 세력의 대선 패배 책임 공방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자성과 자책의 목소리도 꽤 나왔지만, 모두 문제의 본질은 비켜갔다. 특정인이나 특정 세력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 건 분명하지만, 그보다 더 큰 책임은 특정인·특정 세력에게 있다기보다는 한국 사회의 ‘줄 공화국’ 구조와 관행에 있다는 건 거론이 전혀 되지 않았다.

대통령제에서 극단적인 두 얼굴

줄의 본질적인 특성은 원초적으로 성찰이나 자기 교정이 없다는 데 있다. 부르면 무조건 달려가야 한다. 낮에도 좋고 밤에도 좋고 언제든지 달려가야 한다.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서라도 부르면 무조건 달려간다. 물론 충성도 무조건이다. 왜? 나를 불러준 줄이 곧 나의 존재 근거이기 때문이다.

‘줄 공화국’에서 대통령제는 극단적인 두 얼굴을 갖는다. 흥망이 뚜렷하게 대비된다. 잘되면 아주 잘되지만, 망하면 확실하게 망한다. 대통령의 판단에 브레이크를 걸 수 없기 때문이다. 그 판단이 옳은 방향이면 줄에 따라 움직이는 충성파의 일사불란은 큰 힘을 발휘하겠지만, 잘못된 방향이어도 아무런 교정 없이 그대로 나아간다.

충성파는 대통령의 판단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데 앞장선다. 그들 가운데엔 천재 비슷한 사람들도 섞여 있기 마련이어서 그 논리가 꽤 그럴듯하다. 이는 다시 대통령에게 영향을 미쳐 잘못된 판단은 교정의 기회를 영영 놓치게 된다.

이걸 대통령 개인의 탓만으로 돌리긴 어렵다. 줄을 잡고 높은 곳에 오른 사람들이 일시에 집단적으로 미쳐버리는 것이 당연시되는 풍토가 더 큰 문제다. 국민 모두가 줄에 연연하기 때문에 줄에 죽고 줄에 사는 게 흉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줄의 힘이 강할 때엔 대부분 줄서기를 하기 때문에 모든 게 잘 돌아가는 듯 보이지만, 안에서 곪는다. 그러다가 줄의 힘이 약해질 때면 그간 곪은 게 한꺼번에 터져나온다. 한국 정치가 미친 놈 널뛰기하듯 왔다갔다 하는 주요 이유다.

좀더 쉬운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이렇다. 잘나가는 고위 공직자 집안에 무슨 애경사가 있으면 행사장이 몰려드는 방문객들로 미어터진다. 웬만큼 머리가 돌아가는 공직자라면 자신에게 인덕이 있다거나 자신이 공직을 잘 수행해서 그런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건 순전히 자신이 밑으로 늘어뜨릴 수 있는 줄이 길고 튼튼하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 정권 차원에선 그걸 감지하기가 어렵다. 권력에 줄을 선 걸 보고서도 명분에 줄을 선 걸로 착각한다. 그 착각은 명분을 거칠게 몰고 가는 행태로 이어진다. 정권을 지지하는 지식인들은 그런 행태를 정당화·미화하면서 ‘시대정신’ 운운하는 사기까지 친다. 물론 의도하지 않은 사기지만, 의도한 사기보다는 이런 사기가 더 위험하다. 사태를 완전히 오인하게 하는 데 더 기여하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별로 가슴에 와닿지 않으면 기자, 특히 지방에서 활동하는 기자를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볼 걸 권한다. 물론 친한 기자라야 진실을 말해줄 것이다. 지방에선 줄 없인 될 일도 안 되고 줄만 있으면 안 될 일도 된다. 조금 과장해 말하자면, 모든 게 다 줄이다. 줄의, 줄에 의한, 줄을 위한 삶이다. 서울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진 않지만, 그런 양태가 이렇다 할 이슈가 없는 지방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서울에서 정치평론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그런 밑바닥 게임을 완전히 외면하고 거대담론 위주로 이러쿵저러쿵 한다. 지식인들은 냉소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지만, 그건 한국 현실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다. 한국인 대다수는 냉소의 대가들이다. 공적 영역을 거의 믿지 않는다. 주요 공적 제도·기관에 대해 신뢰도 조사를 해보면 10~20% 수준이다.

줄이 ‘코드’를 집어삼키다

이미 냉소의 대가가 돼 있는 사람들에게 냉소주의는 위험하다고 떠들어봐야 씨알이 먹힐 리 만무하다. 대중은 한결같은데 자기 멋대로 대중을 재단하고 평가하던 지식인들은 자신의 착각과 다른 선거 결과가 나오면 비분강개조로 개탄한다. 이번 대선도 마찬가지였다. 한나라당을 지지한 유권자들을 비웃는 건 누워서 침뱉기다. 이 유권자가 바로 대통령 탄핵 사태와 제17대 총선 때 열린우리당 사람들로 하여금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만든 그 유권자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은 대통령 탄핵 사태와 제17대 총선 결과의 의미를 오판했다. 물론 이런 오판엔 많은 지식인들도 동참했다.

뭘 모르고 하는 말일망정 그래도 냉소주의를 비판하는 지식인이 반갑다. 그들은 소수이기 때문이다. 사실 줄서기엔 보통 사람보다는 지식인이 더 능하다. 한 경실련 출신 시민운동가는 “경실련 회원도 아니면서 정책위원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들도 많았는데, 어떤 해는 정책위원이 수백 명이 되던 시절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번 대선에서 한나라당 후보 이명박의 자문교수는 495명에 달했다. BBK 수사 발표 다음날엔 연예인단체, 체육인단체, 예술문화단체, 문인단체, 공인중개사협회 회장단, 정보기술(IT) 분야 교수 및 전문가, 일부 노동조합, 일부 종교단체 등 무려 9개 단체가 지지 선언을 했다. 이명박을 지지하는 어느 네티즌은 “한 나라를 책임 있게 이끌기 위해서는 많은 전문가의 자문이나 조언이 필요하고 그런 참여가 바람직하지 그걸 줄서기로 모는 한심한 이들이 있으니”라고 주장했는데, 그렇게만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국장 양문석은 인사철만 되면 ‘상가지구 목불인견’(喪家之狗 目不忍見)이 벌어진다고 비판한 바 있다. 애국하고 봉사하기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경쟁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는 증거가 수북이 쌓여 있는 걸 어이하랴. 앞서 지적했듯이, 줄서기는 아전인수(我田引水)의 게임이다. 우리 편의 줄서기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반대편의 줄서기는 추하게 보인다. 대통령 노무현은 2007년 8월31일 한 연설에서 “손학규 후보에 대한 범여권의 줄서기가 가관”이라고 비판했지만, 그는 한때 자신에 대한 줄서기도 가관이었음을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지금 나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줄대기, 줄서기, 줄세우기 등의 구조와 관행을 우선적인 개혁 대상으로 삼지 않는 한, 그 어떤 개혁도 사상누각(砂上樓閣)이기 십상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간 개혁을 위해선 줄대기, 줄서기, 줄세우기 등이 필요하다는 이중 기준을 고수해왔다. 노 정권은 그걸 ‘코드’로 미화하기까지 했다. 줄이 코드를 집어삼킨다는 건 생각하지 않았거나 못한 것이다.

내가 노 정권하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 지적한 건 공기업 등 공적 기구 관련 인사에서 줄을 배제하고, 그 영역을 시민사회의 역량으로 움직이게끔 중립화하자는 것이었다. 공직 지망생들이 철학과 실력과 비전으로 시민사회의 상식과 양식에 의해 뽑힐 수 있게끔 개방하자는 뜻이다. 내가 가장 기대한 건 그로 인한 문화·의식의 파급효과였다.

한국 사회를 잘 관찰해보시기 바란다. 자신의 능력과 경륜을 발휘할 수 있는 40·50대 인사들이 가장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일이 무엇인가? 줄 만들기다. 이 힘을 공직에 대한 철학·실력·비전을 만들고 가꾸는 데 돌리게 하자는 것이다. 이게 확고한 풍토로 자리잡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저절로 시민사회에 의해 전 분야의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데 노 정권은 정반대로 했다. 보은·정실 인사가 판을 쳤다. ‘어어, 이런 식으로 노 정권 옹호하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했던 글의 주인공이 얼마 뒤면 무슨 공직을 하나 꿰차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또 얼마 뒤면 그렇게 공직에 오른 사람이 또 다른 보은·정실 행각에 몰두하는 걸 지켜보면서, 노 정권의 어두운 말로를 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극적인 건 이 모든 게 ‘개혁’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줄대기, 줄서기, 줄세우기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게 꼭 필요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힘주어 고발하고자 하는 건 한국 사회의 전 국면이 ‘줄 중독증’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사회의 귀중한 에너지가 ‘줄 만들기’에 과도하게 투입되고 있다. 동창회·향우회·종친회의 번성이 그걸 말해주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에 대한 최소한의 성찰마저 포기했을 정도로 줄에 투항했다. 직장인의 대다수가 인맥을 정정당당한 능력으로 여기고 있다는 여러 조사 결과가 그걸 잘 말해준다. 물론 인맥도 능력이긴 하지만, ‘연고주의 천국’인 한국에서 그 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하다.

인맥이 정정당당한 능력인가

개인 차원에서 생존과 번영을 위해선 ‘줄 만들기’가 불가피하겠지만, 왜 사회적으로 개혁을 외치면서도 ‘줄 공화국’ 체제를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가야만 한단 말인가? 반대편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증오심이 강하면 우리 편 줄에 의존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질 것이다. 바로 그런 ‘선의’에 의해 ‘줄 공화국’ 체제가 강화된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편에 의해 영원히 독식하는 게 가능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면, 이젠 편가르기를 하지 말고 줄의 힘 자체를 약화시키는 대안도 모색해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공존공영(共存共榮)이 괜한 말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에 대해 성찰을 해보는 새해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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