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 역사 창출’ 목적 의식에 투철하다 ‘자위 사관’으로 기운 건 아닌가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요즘 일각의 보수적인 사학자들이 고종을 ‘계몽군주’쯤으로 높여주고… 예술인들이 명성황후를 뮤지컬의 주인공이자 민족 저항의 상징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당시 백성들에게 고종의 집권기는 분노와 절망의 시대였다.”
그가 고종시대를 재조명한 이유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박노자가 2003년에 출간한 에서 한 말이다. 이런 시각에 동의하는 다른 역사학자들도 많지만, 이런 시각을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보면서 고종·명성황후·대한제국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려는 역사학자들도 적지 않다. 그런 학자들의 대표 주자는 단연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이태진이다. 이태진은 “고종 시대사를 연구하면서 나는 자주 착잡한 심경에 빠져들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시대는 우리 민족사에서 국왕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의 무능과 무력이 가장 심하게 드러난 때로서, 지도층이 그런 지경이었으니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인식이 일반화돼 있다. 이런 역사야말로 민족이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대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대에 관한 나의 늦게 시작한 공부가 이런 부정적 역사상이 일본 침략주의에 의해 조장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태진의 ‘발견’은 개화기에 일어난 주요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기존 인식에 도전한다. 내가 최근 출간한 을 쓰는 동안 내내 고민했던 게 바로 이태진의 새로운 해석이었다. 나는 근대사의 아마추어 연구자로서 현재적 관점에서 모든 역사적 논쟁을 소개하는 데 주력했기 때문에 이태진의 새로운 주장이 큰 무게로 다가왔다. 식민사관의 잔재들을 거둬내려는 이태진의 치열한 노력에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이태진의 글을 통해 많은 공부와 더불어 새로운 깨달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어느 쪽 주장이 더 옳은지 그걸 평가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 전문가들의 다양한 주장들을 살펴보면서 배우는 처지다. 그럼에도 평생을 개화기의 역사 연구에 바친 전문학자들 사이에서도 양극을 달리는 견해들이 충돌하곤 한다는 사실은 그 어떤 ‘틀’이나 ‘시각’이 그 큰 효용에도 불구하고 가질 수밖에 없는 어떤 함정을 시사해주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런 의문은 학생이 교수에게도 제기할 수 있는 것이라 믿기에, 내 나름의 감상평을 말해볼까 한다.
이태진은 2000년 8월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모은 단행본 을 출간해 학술계의 화제가 되었다. 이태진은 ‘고종시대를 재조명한 이유’에 대해 “이 책을 통해 고종시대를 파악하는 새로운 틀을 제공하고 싶었다. 양요와 쇄국, 개항, 갑신정변, 아관파천 등 일본 침략주의의 시혜론적 관점에서 서술된 근대사의 흐름은 국민 사이에 패배주의적 역사 인식을 조장해왔다. 이같은 상황에서는 반성 차원을 넘어 자기 비하나 자괴감만 심화될 뿐 긍정적 역사 창출이 어렵다”고 밝혔다.
이태진은 ‘일본인들의 고종 죽이기’로부터 고종을 구해내려는 자신의 시도에 대해 “왕조 사관 부활이란 비판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는데, 이런 비판은 부당할망정 그런 오해를 유발한 책임은 이태진에게도 있는 것 같다. 즉, ‘고종 구하기’ 열의가 앞선 나머지 국왕의 책임을 너무 협소하게만 보고 있는 것이다.
집착한 나머지 사실들을 무시하다
조선조 부패의 대표적 사례로 자주 거론되는 공명첩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보자. 공명첩은 이름을 밝히지 않는 관직 임명장으로 어떤 신분이든지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면 다 구입할 수 있었기에, 그간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태진은 공명첩은 자연 재난으로 흉년이 들었을 때 곡식을 내는 사람들에게 그 대가로 준 것이라며, “공명첩 제도 운영에는 비리도 많았지만 이처럼 공익성을 지니고 시작된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군주가 주관하는 매관은 공명첩이 그랬듯이 공익의 명분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군주가 무엇이 부족해서 자신의 공기를 치부의 수단으로 삼겠는가. 다만 그 그늘 속에 세도정치기에 성행한 인사 관련 권력자들의 음성적 매관 행위가 덩달아 성행한 점이 문제였다”며 “누가 이것을 나쁜 정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세도정치기에 성행한 인사 관련 권력자들의 음성적 매관 행위’이며,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살피는 동시에 이에 대한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느냐에 대해서도 답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즉, 이태진은 ‘고종 살리기’에만 집착한 나머지 세도가문의 광범위한 매관매직은 비교적 작은 문제로 다루면서 그마저 고종의 책임은 아니란 듯이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태진은 조선이 ‘은둔국’으로 규정된 것에 대해서도 강한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은둔국’이란 딱지는 대원군 집권기까지는 적절할 수 있지만, “이 시기를 벗어나서도 은둔국이란 딱지는 떨어지지 않는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876년 조-일 수호조규, 1882년 조-미 수호통상조약, 1883년 조-영 수호통상조약 등 각국과의 수교 통상이 시작된 후에도 은둔국이란 규정은 철회되지 않는다. 1910년에 일본에 나라가 병합되었을 때는 은둔과 쇄국 때문에 이렇게 병합되는 지경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이 붙기까지 하였다. 이런 인식 아래 한국 근대사는 곧 자력 근대화에 실패한 역사로 평가되었다. 한국인들은 지금도 국제적으로 어떤 큰 시련을 겪게 되면 ‘실패한 근대’를 들먹인다.”
이태진의 이런 주장에 대해선, 조선이 ‘적극적 자세’를 가진 게 너무 늦은 시점이 아니었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매우 중요한 게 아닌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다. 강재언이 지적한 바와 같이, 1882년경 “이미 양국(조선·일본) 간의 국력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벌어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 자력 근대화가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건대, ‘실패한 근대’를 들먹이는 게 그리 무리라고 여겨지진 않는다.
갑신정변은 어떻게 볼 것인가? 이태진은 갑신정변을 무모하게 추진돼 결과적으로 국가에 큰 짐을 지운 해프닝으로 격하했다. 나의 경우, 갑신정변을 근대화의 시발점으로 평가하는 시각보다는 이태진의 시각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태진이 일본에 대한 반작용 또는 반사적 태도로 일관하는 건 안타깝게 여겨진다.
이태진이 갑신정변을 ‘일본의 계략에 놀아난’ 것으로 보는 것까진 좋은데, 그 근거를 갑신정변 이후 일본의 ‘김옥균 이용’과 연결하는 건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태진은 김태웅의 논문 ‘일제강점기 김옥균 추앙과 위인 교육’(2000)을 거론하면서 “이 논문은 ‘한국 병합’ 후 일본 낭인 출신들이 추앙사업을 시작하고 친일 지식인들이 계속해서 위인 만들기 사업을 벌인 것을 자세하게 추적하여 본고의 논지를 크게 뒷받침하였다”고 주장했다. 일제 식민사관의 의도를 날카롭게 꿰뚫어보는 이태진이 일제의 ‘김옥균 이용’의 의도는 너무 단순하게 해석하는 건 아닐까?
부정적 이미지는 모두 조작?
명성황후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옛 노인들은 며느리를 흉볼 때 가끔 ‘민후(閔后) 같은 년’이란 말을 썼다고 한다. 물론 민후란 명성황후를 가리킨다. 명성황후를 이런 부당하고도 지독한 욕으로부터 구출해내는 건 꼭 필요한 일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다.
이태진은 명성황후의 부정적 이미지는 모두 일본이 조작한 것이며, 명성황후는 세도가가 아니라 애국자였다고 주장했다. 이태진은 최근 ‘역사소설 속의 명성황후 이미지’라는 논문에서 명성황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계보를 추적했다. 그렇지만 일본인들 이전에, 조선인들이 명성황후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건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이태진은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명성황후에 대해 비판적인 황현의 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 격파를 시도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의문이 해소된 건 아니다. 반일과 명성황후 비판의 입장을 동시에 표출한 조선인은 비단 황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명성황후에 대한 비판이 일제에 의해 과도하게 부풀려졌다는 것엔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지만, 일제의 그런 악용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날 수 있는 명성황후 재평가의 위험도 경계하는 게 좋다.
이태진이 고종과 명성황후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함으로써 던지려는 메시지는 결국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와 연결된다. 그는 “대한제국은 무능으로 망한 것이 아니라 근대화 사업의 빠른 성과에 대한 일본의 조기 박멸책에 희생되었던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대한제국은 무능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많은 가능성 때문에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주의에 부딪혀 좌초하고 말았다”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런 발상에 문제는 없을까?
이태진의 이런 주장에 대해선 사회진화론에 대한 비판과는 정반대의 관점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다. 제국주의 기운이 전세계를 덮치고 있던 시절, 국가 간의 관계에서 다른 나라의 침략주의나 국가이기주의를 비판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근대화의 의지를 국방력과 분리해 말해도 되는 걸까? 타국의 박멸책이나 침략주의를 막아내지 못한 것 이상 더한 ‘무능’이 있을 수 있을까?
식민사관의 주요 공격 대상은 조선 지배계급의 부패와 무능이다. 일제는 그렇게 해야 조선 민중이 일제를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받아들이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식민사관으로 오인받지 않기 위해 조선 지배계급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거나 그들을 미화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신채호는 유교가 사대주의와 당파싸움의 원인이고 그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보았다. 신채호뿐만 아니라 한말·일제 때의 많은 지식인들이 ‘유교 망국론’을 주장했다. 반면 이태진은 서양인들이 한국 발전의 비결로 꼽는 ‘유교 자본주의론’을 들어 ‘유교 망국론’을 반박했다. 그러나 ‘유교 자본주의’는 양반제도가 사라진 이후에 가능했기에, ‘유교 망국론’은 양반제를 전제로 한 유교의 폐해를 지적한 것으로 보는 게 옳다.
이태진은 “일제강점하 양반문화에 대한 매도는 거의 습관화된 담론이었다. 양반의 잘못으로 나라가 망했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없는 사실이 되었다. 이런 담론은 계속될수록 조선총독부의 ‘시정 개선’ 선전효과가 생기고 조선인의 복종심을 더 키울 수 있는 것이었다”고 개탄했다.
일면 공감할 수 있는 주장이지만, 문제는 이것이 양자택일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즉, 일본이 그런 나쁜 의도로 퍼뜨린 말이니 반대로 생각하라고 말할 것인가? 그래서 양반과 당파성을 옹호해야 할 것인가? 이는 일본이 부린 한 번의 술책에 우리가 두 번 놀아나는 건 아닐까?
이태진의 사학은 ‘왕조 사관’이 아니다. 그가 원하는 건 ‘긍정적 역사 창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목적 의식에 투철하다 보면 ‘자위(自慰) 사관’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이태진은 한 대학생이 자신에게 조선시대 정치사를 희망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어 고맙다는 편지를 보내왔다고 밝혔다. 자위의 현실적 효능을 말해주는 사례는 아닐까?
식민사관은 복잡·교묘하다
일본인이 한국인을 폄하했던 것처럼 우리가 일본인의 지능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라면, 식민사관은 단순·무식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복잡·교묘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식민사관의 단순무식성을 공격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효과다.
그럴 만한 바탕이 없는 가운데 왜곡·날조를 해봐야 먹혀들기 어렵다.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걸 부풀릴 때 의도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식민사관이 많은 한국인들을 사로잡았다는 게 그 증거다. 그런 한국인들을 어리석다고 매도하기는 쉽지만, 너무 쉬운 일만 하다 보면 또 한 번 역으로 우리가 당할 수 있다. 식민사관을 공격하느라 본의 아니게 우리의 어떤 점을 정당화하거나 미화할 때에 생겨날 수 있는 부작용도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우리 자신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더 필요하다고 본다. 나는 그것과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심어준, 그리고 나중엔 우리 자신에 의해 확대재생산된 ‘자기 비하’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구분을 전제로 하여 우리 자신에게 엄격하게 구는 것이 진정 ‘포지티브’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관대한 방식으로 ‘긍정적 역사 창출’을 한다 하더라도 그 수명이 오래가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자학과 자위를 동시에 넘어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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