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쏠림’ ‘바람’의 정치 풍토, 여론 형성의 독특한 구조에서 제 기능 못해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루소(1712~78)는 “여론이야말로 세계 최고의 여왕이며 그것은 국왕의 권력에도 복종하지 않는다. 국왕들은 바로 이 여왕에게 직접 시중을 들어야 하는 노예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그가 살던 시절엔 진보적인 사상이었겠지만, 오늘날엔 ‘여론’이 정치를 타락·보수화시키는 한 이유가 되고 있다. 대중민주주의 체제하의 좌파가 여론조사에 반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얼른 생각하면 머릿수가 많은 민중 파워가 여론조사를 통해 나타날 것 같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여론조사 경선, 세계적 망신거리
1960년대 프랑스 정치에 여론조사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자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여론조사가 ① 여론조사는 모든 사람이 의견을 갖고 있다 ② 모든 의견이 똑같은 무게를 갖고 있다 ③ 물을 만한 가치가 있는 질문에 관한 동의가 이루어졌다 등의 그릇된 전제 위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여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미국의 좌파 언론학자 허버트 실러는 “여론조사는 현상유지를 위한 매춘”이라고까지 주장했다.
물론 그런 비판에도 오늘날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들은 ‘여론 민주주의’를 위한 방법론인 여론조사를 왕성하게 하고 있다. 무엇보다 여론조사는 여론 민주주의의 한 기둥이라 할 언론매체의 주요 영업 수단이기 때문에,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한 여론조사를 통제한다는 건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기껏해야 여론조사 방법을 검증하는 수준의 공적 규제만 있을 뿐이다. 투표 6일 전부터는 언론의 선거 여론조사 보도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한국처럼 최소한의 규제를 가하는 나라들도 있지만, 규제가 없는 나라들이 더 많다.
많은 이들이 한국처럼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정치판이 요동치는 나라도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여론조사 공화국’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물론 좋은 의미는 아니다. 여론조사의 오·남용이 심하고, 국민 역시 여론조사 결과에 너무 휘둘리고 있다는 뜻이다.
엉터리 여론조사가 가끔 자행되는 것도 바로 그런 풍토에 편승한 것이리라. 엉터리 여론조사가 많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건 큰 문제는 아니다. 나중에라도 밝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여론조사의 실세인 주요 언론매체가 그런 엉터리 짓을 했다간 신뢰도에 치명상을 입을 것이므로 함부로 시도하기도 어렵다.
단국대 교수 윤석홍은 “영향력을 감안하면 현재 우리의 여론조사 분야는 무법지대나 다름없다”면서 “선거뿐 아니라 여론조사 전반에 대해 조사의 수준을 평가하고, 조사기관의 윤리준칙 준수를 강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학계의 전반적인 의견인바, 하루빨리 여론조사에 대한 공공적 통제를 가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보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가 있으니, 그건 바로 여론조사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다. 여론조사를 아무리 엄격하게 과학적·윤리적으로 한다 해도 여론조사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해버리면 더욱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과도한 의존의 대표적 사례가 정당 내 여론조사 경선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국민대 교수 이명진은 “당원들이 해야 하는 후보 선출에 여론조사를 활용하는 것은 정당정치를 포기한 얄팍한 포퓰리즘”이라고 했다. 서울대 교수 박찬욱도 “지금과 같은 정당의 후보 선출 방식은 여론조사의 본질을 모르는 ‘조사 문맹’(Research Illiteracy) 현상이자, 정치적 선택이 가요 인기 투표와 같다고 여기는 포퓰리즘”이라며 “노선과 이념에 관계없이 누구든 지지율만 높으면 된다는 풍조는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장 김헌태는 “(여론조사 경선은) 세계적 망신거리”라고 했다. 기자 주용중은 “당 후보를 여론조사로 뽑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대만뿐이다. 대만은 국민당의 일당 통치에서 벗어난 지 10년도 되지 않는 민주정치의 후발국이다. 우리가 구태여 그런 나라의 제도를 본받을 이유는 없다. 여야는 여론조사를 여론조사 본연의 자리로 되돌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향식’이 개혁의 보증수표이던 시절
좀 다른 경우이긴 했지만, 정당 내 여론조사 경선의 원조는 2002년 대선 직전 여론조사로 성사된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였다. 당시 단일화의 드라마적 가치가 워낙 커 대충 넘어가긴 했지만, 그건 여론조사 오·남용의 극치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지금도 ‘드라마적 가치’에만 집착해 그 사건을 재현하려는 시도만 왕성하게 이루어질 뿐, 왜 그게 문제였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성찰도 찾아볼 수 없다.
왜 그럴까? 전문가와 일반 민심의 괴리가 크다. 전문가들은 정당정치의 원리를 내세워 여론조사 경선을 비판하지만, 정당을 포장마차보다도 수명이 짧은 것으로 알고 있거니와 실제로 그렇게 경험해온 유권자들의 입장에선 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여론조사 자체를 못하게 했던 독재정권 시절의 상흔이 유권자들의 뇌리에 ‘여론조사=민주주의’라는 등식을 성립시킨 점도 있다. 선거에 여론조사가 도입된 것은 1987년에 치러진 제13대 대통령선거 이후였으니, 이제 겨우 20년의 역사인 셈이다. 자유롭게 자기 의사 표현을 해도 괜찮더라는 걸 알고 솔직하게 여론조사에 임한 건 10년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여론조사 경선을 선호하는 정치인들에게도 비슷한 상흔이 있다. 당내 민주화가 안 돼 있던 시절 여론조사는 ‘보스 정치’를 깰 수 있는 최상의 수단이었다. 여론에 따른 ‘상향식’ 공천과 의사결정은 무슨 개혁의 보증수표인 양 떠받들어지는 시절이 꽤 길었던 것이다. 그런 의식에 기초해 정치적 열세를 순식간에 만회해보려는 한탕주의 심리가 작동하고 있다고나 할까.
국회의원들의 직업적 문화 또는 행태는 그 속성상 늘 한탕주의 심리로 가득하다는 현실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그들은 뜨지 않으면 죽는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다. 이 강박은 국정감사 때에 잘 드러난다. ‘언론플레이’라는 표현도 점잖은 말이다. ‘필사적 몸부림’이라는 게 더 적합한 표현이다. 언젠가 모 의원은 국정감사 전에 보좌진 전원으로부터 ‘각서’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의원의 국감 활동이 언론에 제대로 부각되지 않으면 해고를 감수한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텔레비전 9시 주요 뉴스에 보도되면 10점, 신문 1면 톱에 실리면 10점” 등 구체적인 ‘성적표 작성 방식’까지 정했다나.
그런 언론플레이에 취약한 언론도 문제가 있지만, 이런 문제는 의원이나 언론 탓만 할 일은 아니다. 유권자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별 업적이나 실적이 없는 정치인이라도 언론매체를 타서 유명해지면 금방 여론조사에서 유력 정치인 리스트에 오르는 세태에선 의원들이 언론 보도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알고 보면 유권자들도 구조의 포로다. 무슨 구조인가? 한국의 독특한 여론 형성 구조다. 그 구조의 가장 큰 특성은 잦은 ‘변심’이다. 한나라당 의원 전여옥은 “변심은 유권자의 기본이자 특권”이라고 했다. 정치인으로선 백번 옳은 말이다. 민심은 무조건 위대한 것이며 그래야만 한다. 유권자의 표가 정치인의 존재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심의 이유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청춘 남녀 사이의 변심에도 이유는 있는 법인데, 여론조사·투표에서의 변심에 이유가 없을 리 없다.
그런데 우리는 사회적 차원에서도 무조건 유권자의 변심을 정당화·미화하는 쪽으로만 치닫고 있다. 모두 다 ‘대중의 지혜’의 신봉자들 같다. 그렇지만 ‘대중의 지혜’는 하나 마나 한 소리다. 구조적으로 대중은 늘 지혜롭게 돼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그 자체의 힘(머릿수 파워) 때문에 대중의 선택은 정당화되고 지혜가 되게끔 돼 있다. 대중은 이미 ‘지혜’라는 답을 내장하고 있는 개념인 것이다. 예컨대, 대중이 선거에서 아주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망정 그걸 무슨 수로 꾸짖을 것이며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런 선거에서 과실을 챙긴 사람들이 앞 다투어 ‘대중의 지혜’를 역설할 게 뻔한데 말이다.
우리는 여론의 변심 이유를 캐는 데 너무 게으르거나 아니면 너무 선거 전문가 같은 냉소로 대응하고 있다. 누군가 이벤트 한 건을 잘 올려 지지율이 좀 오르면, 너무도 쉽게 편승해 곧 눈덩이 효과를 만들어내고야 만다. 대중을 폄하하는 건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한국 여론 형성 구조의 10가지 특성을 지적하면서 이야기를 해보자.
한국 여론 형성의 10가지 구조
첫째, 미디어의 1극 중앙집권 구조로 인해 ‘쏠림’이 심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여기지만, 전 국민의 미디어 이용 시간의 90% 이상을 점유하는 미디어가 한 도시에 집중돼 있다는 건 놀랍게 생각해야 할 사실이다. 그런 지리적 집중성과 더불어 학연·학벌주의로 인해 미디어 종사자들의 동질성이 매우 높아 ‘쏠림’을 악화한다.
둘째, 강한 외부지향성과 타인지향성으로 인해 ‘편승’이 심하다. 그래서 “지지율이 높기 때문에 지지한다”는 동어반복 현상이 상례화돼 있다. 이는 각 개인의 신념 구조나 그 어떤 사실적 기반에 의해 형성된 여론이 아니기 때문에 여론의 불안정성과 휘발성을 낳는 주요 이유가 되고 있다.
셋째, ‘반감의 정치’로 인한 반사적 성격이 강하다. 정치에 대한 냉소·불신이 강해 정치적 지지는 지지 대상에 대한 ‘포지티브’ 심리보다는 반대 대상에 대한 ‘네거티브’ 심리에 의해 형성된다. 이 또한 여론의 불안정성과 휘발성을 낳는 주요 이유가 되고 있다.
넷째, 정당정치의 기반이 부실해 일관성이 약하다. 일종의 악순환이라고나 할까. 정치에 대한 불신·혐오 때문에 기존 정당보다는 늘 신진세력을 선호하는 여론이 정당정치의 부실화를 가져오는 역설을 낳고 있다.
다섯째, 인물 중심주의 문화가 강해 지속성이 약하다. 기득권 세력에 대한 총체적 불신과 반감으로 인해 새로운 인물을 대안으로 모색하는 성향이 농후하다. 물론 그로 인한 좋은 점도 있겠지만, 여론의 불안정성과 휘발성은 피할 길이 없다.
여섯째, 지역주의적 고려가 이슈·정책 파워를 약화한다. 지역주의적 고려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걸 모든 사람들이 당위적으론 인정하기 때문에 이는 기존 여론조사 방식으론 잡아내기 어렵다. 그래서 더욱 문제가 된다.
일곱째, 드라마·이벤트에 약한 감성 체질이다. 타고난 감성 체질도 있겠지만, 위에 지적한 이유들이 감성 파워를 키워 드라마·이벤트의 가치를 증대한다. 드라마·이벤트의 바탕엔 그 어떤 시대정신이 깔려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지만, 여론 형성의 안정성을 해치는 건 분명하다.
여덟째, 여론 선도자의 기능이 강해 조작에 취약하다. 이 문제는 인터넷 시대에 이르러 증폭되고 있다. 앞서 지적한 ‘쏠림’과 ‘편승’은 여론 형성 초기에 ‘작전세력’이 활개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아홉째, 바람에 약하고 바람을 사랑한다. 이는 그동안 한국정치에서 대체적으로 보아 긍정적 영향을 미쳐왔다. 기득권 구조를 일시에 허물어버릴 수 있는 물갈이를 가능케 한다거나 기득권 세력에게 경고의 의미를 보내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열째, 성찰을 어렵게 한다. 이는 바람에 약하고 바람을 사랑하는 여론 형성 구조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바람기는 유권자의 특권이라곤 하지만, 그게 지나치면 대접받지 못한다. 정치인들은 여론을 무서워하는 동시에 깔보기 때문이다. 언제든 바람 한번 불면 쉽게 뒤집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자신의 과오를 심각하게 성찰하기보다는 바람을 만들 수 있는 드라마·이벤트를 연출하는 데 집중한다. 이는 정치인들의 한탕주의를 창궐케 하고 성찰의 씨를 마르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선거나 여론조사에서 자기 입맛에 맞는 결과가 나오면 ‘대중은 위대’하고, 자기 입맛에 맞지 않으면 ‘반대편의 음모와 방해’ 때문에 그렇다는 식의 이중잣대가 만연해 있는 것도 바로 그런 대중 폄하에서 비롯된다.
성찰은 고갈하고 불안정성은 증대하고
대중은 여론조사를 일종의 게임으로 즐길 뿐이기 때문에 바람 따라 노는 것에 별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여론조사는 범국민적 오락인 셈이다. 일종의 ‘바람 놀이’다. 굳이 좋게 말하자면, 정열과 소신의 부질없음을 깨달은 체념과 냉소의 지혜라고나 할까. 가벼운 인상 비평의 수준에서 자신의 선택을 게임으로 여기는 기존 ‘여론조사 공화국’ 체제는 신축성·융통성·역동성 등과 같은 나름의 장점이 있으므로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지만, 그 사회적 비용은 성찰의 고갈과 더불어 정치적 불확실성·불안정성의 증대로 나타난다. 하긴 그게 오락의 묘미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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