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표현되기 어려운 지식, 공적으로 나누지 않는 ‘사적 사회’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미국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가 (1982)라는 책으로 유명해지자, 사람들은 그에게 “나는 당신이 책에서 말한 것들을 대부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모든 조각들을 한데 모아 정리해주었지요”라고 말하곤 했다. 칭찬 같으면서도 듣기에 따라선 폄하의 의미도 담겨 있는 평가였다.
일본은 암묵지 강국, 한국은 명시지 강국
그러나 나이스비트는 (2006)라는 책에서 그런 평가에 대해 “‘익은 과일 따기’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최고의 찬사다”라며 “문제는 무엇을 따서 어디에 놓을까 하는 것이다”고 여유를 보였다.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을 연관지어 하나의 커다란 그림으로 엮어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익은 과일 따기’라는 재치 있는 표현을 접하면서 새삼 ‘암묵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요즘 텔레비전에 흘러넘치는 음식 관련 프로그램마다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하나 있다. 맛있는 음식의 요리 비결이 뭐냐는 질문에 요리사가 ‘절대 비밀’을 고집하는 장면이다. 그 비밀을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론 어림도 없다는 게 요리사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손맛’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오랜 기간 옆에서 시중을 들면서 지켜봐야만 그 비법을 제대로 전수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유형의 지식을 가리켜 암묵지(暗默知)라고 한다. ‘암묵’이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암묵지는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 어려운 지식이다. ‘손맛’이나 ‘솜씨’를 구체적으로 명문화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암묵지는 도처에 널려 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암묵지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맛’이나 ‘솜씨’만이 암묵지는 아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공식화·정식화되지 않은 채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떠돌아다니는 지식도 암묵지로 볼 수 있다. 나이스비트가 말한 ‘익은 과일 따기’는 바로 이 두 번째 유형의 암묵지에 관한 것이다. 다양한 종류의 암묵지가 있을 것이기에 암묵의 정도에 따라 가칭 ‘암묵지 등급제’로 분류를 시도해보는 것도 가능하겠다.
암묵지의 반대는 겉으로 분명하게 표현된 걸 이해할 수 있는 명시지(明示知)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일반적인 지식이다. 이 분류법을 선보인 마이클 폴라니는 “우리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알고 있다”며 기존의 철학적 인식론이 명시지만을 특권화하고 있음을 비판했다.
명시지를 우대하는 역사연구도 문제다. 체제·제도·법·규칙·선거·사건·사고 등은 명시지의 영역인 반면 정신자세·의식·전통·습속·관습·관행·기질 등은 암묵지의 영역이다. 역사가 후자를 무시하고 전자 위주로 기록된다고 생각해보라. 왜곡이 발생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런 역사 기술은 인간을 왜소하게 만들고 성찰을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게끔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폴라니는 암묵지에 무게를 두면서 일본 기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암묵지에 기반한 지식화에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긴 일본인들은 이 점에선 지독한 면이 있다. 최근 세계 2위의 철강기업인 신일본제철은 전후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團塊) 세대의 대량 정년퇴직에 대비해 그들의 암묵지를 기록하고 공유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일본이 ‘암묵지 강국’이라면 한국은 ‘명시지 강국’이다. 학교나 책에서 배울 수 있는 지식의 전형인 명시지에 관한 한 한국은 세계적인 지식 강국이다. 불타는 향학열은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기부 문화가 미성숙함에도 불구하고 거액의 기부 행위가 이뤄졌다 하면 대부분 학교로 몰린다. 배움에 대한 한을 갖고 있으며 여전히 그 한을 키우고 있는 한국인의 뜨거운 지식 사랑은 다른 나라의 추종을 불허한다.
연고·정실 통해서만 전파돼
반면 암묵지는 어떤가? 암묵지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암묵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 정부·공공기관 운영과 기업 경영의 방법은 명시지가 아니라 암묵지다. 그 방법을 다룬 책이 있을 리 없다. 그건 인터넷에도 없다. 그런 일을 담당했던 사람들로부터 직접 전수받아야 할 지식이다. 적어도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그건 꼭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일을 공식화하거나 체계화하지 않은 채 주먹구구식으로 해내고 있다. 업무 인수인계를 하는 사람들끼리 배짱이 맞으면 많이 배우고, 배짱이 맞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식으로 그때그때 다르다.
이른바 ‘리더십 암묵지’는 어떤가? 아예 없다. 어느 분야에서건 높은 자리는 그 자리가 제공해주는 권력과 명예에 큰 의미를 두기 때문에 나눠주고 즐기는 데에만 의미를 둘 뿐이다. 그간 각 분야에서 수많은 리더들이 배출됐지만 암묵지의 공유를 위한 책을 쓴 사람이 거의 없다. 자서전이라고 해서 나온 걸 보면 거의 모두 자기 자랑 일색이다. 공익 마인드가 강한 시민운동가마저 내부 비판을 했다는 핀잔을 들을까봐 시민운동의 암묵지에 대해선 입을 다문다.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암묵지는 이런저런 이유로 사장되고 있는 것이다.
암묵지는 보수주의 또는 시장주의의 이론적 근거이기도 하다. 시장을 예찬한 하이에크에게 시장은 사회 전체에 확산돼 있는 정보를 전달하고 동원하는 발견의 과정, 즉 인식론적 장치였다. 김비환의 해설에 따르면, “그와 같은 종류의 지식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가격결정 방식이 아니라면 도저히 반영해낼 수 없는 지식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체제의 보편적인 빈곤화 현상은 사회의 모든 곳에 확산되어 있는 ‘암묵지’를 수집할 수도 계산해낼 수도 없는 계획경제의 ‘인식론적 실패’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를 들어 암묵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걸 보수적 태도라고 보는 건 난센스다. 오히려 사회주의를 위해서라도 암묵지에 주목해야 한다는 정반대의 결론도 가능하다. ‘암묵지를 소중히 하는 계획경제’가 결코 융합할 수 없는 모순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암묵지에 취약한 사회주의 이야기를 꺼낸 건 그와 비슷한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는 뜻이다. 한국에선 ‘계획경제’ 대신에 ‘사적 사회’라는 문제가 있다. 한국에선 공적인 건 의례성이 강하고 중요한 건 주로 사적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공적인 것마저도 사적 용도로 전환되기 일쑤고 공사 구분 의식도 희박한 편이다.
역설 같지만, 이게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사적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라도 공적 노력을 치열하게 하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좋은 점도 있다. 한국 사회에 ‘신뢰’가 없다고 하지만, ‘공적 신뢰’만 없을 뿐 ‘사적 신뢰’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복지 문제도 서양식 통계법만으로 봐선 안 된다. 한국엔 서양엔 없는 이른바 ‘연고 복지’가 있기 때문이다.(주변에 아는 사람이 어렵게 돼 보험 한 건 안 들어준 사람 있는가?)
‘사적 사회’에서 암묵지는 결코 공유해선 안 될 사적 무기다. 공공 영역은 우선적으로 사익을 추구하기 위한 마당이기 때문에 수익 분배 구조가 애매한 암묵지 전파에 열을 올릴 이유가 없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암묵지가 완전히 사장되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암묵지는 연고·정실 등 사적 네트워크를 통해 전파되고 애프터서비스까지 받는다. 튼튼한 사적 인맥이 없으면 죽어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정규직, 암묵지 무시하는 기업들
기업은 어떤가? 기업에서도 사원들의 ‘안전 욕구’ 때문에 암묵지 공유가 이뤄지지 않는다. 그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면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 그간 많은 전문가들이 암묵지 공유를 위한 방안들을 내놓았다.
김병도는 암묵지의 공유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직원들 간 비공식적인 대화를 촉진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직원들 간의 대화가 좀더 자연스럽게 유도되도록 사무실 레이아웃을 원형이나 개방형으로 디자인하거나 마케팅 부서와 생산 부서의 모임을 정례화하고 서로 지식을 공유할 기회를 갖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다.
홍성욱은 지식이나 학습의 핵심은 단순히 정보의 습득이나 보관이 아니라 이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의 존재이기 때문에 지식경영은 정보의 운영력이 아니라 인간경영이라고 주장했다. 즉, 그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새롭고 도움이 되는 지식을 만들도록 고무하고, 경험을 통해 얻은 암묵지를 공유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 좋은 말씀이다. 그런데 일부 기업들은 암묵지 알기를 우습게 알고 근시안적인 소탐대실(小貪大失) 전략으로 임하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가 그걸 잘 말해주고 있다. 장하준이 잘 지적했듯이, 자본이 필요에 따라 노동자들을 자유롭게 고용하고 해고할 수 있는 ‘노동시장 유연성’은 그 어떤 일시적 장점에도 헌신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암묵지를 가진 숙련 노동자를 키울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세계적인 ‘1류 기업’으로의 도약을 영영 어렵게 만든다.
지난해 4월 기자 황경근은 연임 제한으로 나설 수 없는 3선 지방자치단체장들과 관련, “떠나는 3선 단체장이 자신의 시행착오나 정책 실패에 관한 보고서를 만들어 뒤를 이을 초보 단체장에게 선물하면 어떨까. 아마도 초보 단체장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선물이 될 것이다. 자치 무대에서 내려오는 날, 자신의 치적을 줄줄이 외는 것보다 시행착오나 실패를 고백하며 떠나는 3선 단체장의 뒷모습은 더욱 아름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아주 좋은 제안이다. 그러나 그런 아름다운 일은 일어나기 어렵게 돼 있다. 다시 말하지만, ‘사적 사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시행착오나 실패를 고백하는 건 꿈같은 일이거니와, 자신이 잘한 일에 대해서도 후임자가 일을 더 잘해버리면 자신의 치적이 가릴 텐데 사적 이해관계 없이 자신의 암묵지를 그냥 넘겨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 문제와 더불어 ‘익은 과일 따기’를 우습게 생각하는 고정관념도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이라 하더라도 그것들을 연관지어 하나의 커다란 그림으로 엮어내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암묵지는 바로 그런 ‘연관의 지식’이기도 하다. 그러니 앞서간 사람들의 경험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독보적인 지식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문제는 학계가 가장 심각하다. 좁고 깊게 들어가는 걸 본령으로 삼는 분업화·전문화의 함정 때문이다. 자꾸 새로운 것만 찾다보니 더 좁고 깊게 들어갈 수밖에 없고, 그 와중에서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의 종합화와 연계 효과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진정한 지식강국이 되기 위한 조건
신문이라도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암묵지가 공유되게끔 앞장서는 게 인터넷 시대에 생존하고 성공할 수 있는 길이겠건만,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그걸 외면한다. 사실 핵심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사회의 지식에 대한 인식에 근본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암묵지는 고상하지 않다. 화려하지도 않다. 재미도 없다. 지적 욕구나 허영심을 충족시켜주기엔 역부족이다. 서양 지식의 세례를 듬뿍 받고 자란 한국인들에게 암묵지를 지식으로 간주하는 것 자체가 어색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삶은 누추한데, 지식은 고상하고 화려한 것만 추구하겠다면 어쩌자는 건가? 삶과 지식의 괴리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글로 쓰인 암묵지엔 한계가 있지만 없는 것보다는 백번 낫다. 자꾸 연구하면 암묵지의 기록을 위한 좋은 방법이 나올 수도 있다. 사회적 차원의 지원이 절실하다. 각종 공·민영 지원사업과 학술진흥 사업 등이 암묵지 개발·확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암묵지 제공자에 대한 충분한 보상도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시행착오 비용을 줄여나가고 기존의 암묵지를 더욱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적어도 이런 수준의 ‘암묵지 혁명’이 일어나야 한국 사회가 진정한 지식강국, 지식기반 경제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암묵지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여건 조성을 사회 개혁의 우선순위로 삼아야 한다. 그런 여건 조성을 무시하면서 사람만 바꾸면 모든 게 달라질 것처럼 생각하는 건 환멸의 악순환만 초래할 뿐이다. ‘현실과 이상’의 이분법도 폐기처분해야 한다. 암묵지를 무시해 실패한 사람에게 ‘이상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려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주는 관행도 청산해야 한다.
민심을 청취해보면 전국 방방곡곡에 익은 과일들이 주렁주렁 열렸다는 걸 누구나 감지할 수 있다. 과일을 따서 유통시키고 다음 농사까지 준비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암묵지조차 공부하지 않은 채 무작정 덤벼드는 어리석음과 무모함을 더 이상 반복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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