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되는’ 사건만 질타하지 말고 공기업 개혁을 대선 이슈로
▣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십수 년 전 살아 있는 곰의 배에서 쓸개즙을 빼내는 장면이 TV로 보도됐을 때, 이는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분노의 목소리가 들끓었다. 그러나 그건 그 직전 신문에 크게 소개된 적이 있는 ‘유망 부업’이었다. 그때엔 아무런 이의 제기조차 없었는데, 왜 그렇게 갑자기 달라진 걸까?
글과 그림의 차이는 이렇게 크다. 살아 있는 곰에서 쓸개즙을 계속 빼낸다는 말을 들어도 사람들은 놀라지 않는다.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걸 생생한 그림으로 볼 때엔 달라진다. 인간의 잔인함에 전율마저 느끼게 된다.
웅장한 이과수 폭포 앞에 쏟아진 분노
이처럼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인지법은 ‘시각주의’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지만, 디지털 혁명은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열었다. 최근의 사용자제작콘텐츠(UCC) 열풍이 말해주듯이 2000년대는 ‘보여주는 문화로의 전환’을 넘어서 완성 단계에 접어든 시대다.
최근 시각주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이과수 혁신 세미나’ 사건이다. 공기업·공공기관 감사 21명이 주인공으로 출연한 이 사건에 분노한 시민들이 많았다. 특히 TV에 자료화면으로 이과수 폭포의 웅장한 모습이 소개됐을 때 분노가 고조됐을 게다. 해외 관광을 사랑하는 한국인으로서 누군들 그곳에 가고 싶지 않으랴. 그런데 고위 공직자들이 국민 세금으로 ‘혁신 세미나’를 빙자해 그곳에 놀러갈 계획을 세웠다니 이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런 심정이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이는 비교적 ‘사소한’ 사건이다. 정작 분노해야 할 일은 그게 아니다. 공기업·공공기관의 평소 실력이다. 임원들의 정치적·정략적 충원 방식과 높은 연봉 수준이다. 직원들도 호강을 누리고 있어 공기업·공공기관은 ‘신이 내린 직장’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런데 왜 평소에 우리는 이런 문제에 적극 대응하지 않는 걸까?
공기업·공공기관의 방만한 경영과 도덕적 해이는 언론의 단골 비판 메뉴다. 정치적 이유로 보수신문들의 비판이 더 왕성하긴 하지만, 공기업·공공기관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데엔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모두 동의한다. 그간 나온 언론 비판을 몇 가지 길게 소개하고자 한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나는 이미 지면을 통해 공기업·공공기관의 문제를 여러 차례 지적했다. 지난해 10월 노무현 정권 인사들의 ‘끼리끼리 뜯어먹자판’을 비판했을 때엔 공기업의 감사로 일한 적이 있는 어느 분으로부터 강한 항의를 받았다. 개혁을 위해 ‘코드 인사’를 하는 게 왜 문제가 되느냐는 반론이었다. 이론적으론 타당한 반론이었지만, 도대체 무슨 개혁을 했다는 것인지 ‘실천’에 있어선 동의하기 어려웠다. 수년째 계속되고 있는 신문들의 다음과 같은 비판에 어떻게 답할 것인지 묻고 싶다.
“경영 상태 ‘범죄’ 수준” 이래도
“공기업의 도덕적 해이는 국민의 가슴을 시리게 한다. 일반 국민들은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실직·노후 걱정에 하루하루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그런데도 공기업들은 온갖 구실로 자리를 늘리거나, 명예퇴직금에다 일거리를 얹어주거나, 임금을 정부 기준 이상으로 올리거나, 헛돈을 이리저리 써서 감사 지적을 받는 등 딴 세상처럼 살고 있다.”( 2004년 10월11일)
“공기업에서 왜 이런 후안무치한 일이 해마다 되풀이되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 공무원들의 철밥통 의식과 정권의 전리품으로 생각하는 공기업 감사나 임원에 대한 잘못된 임명 관행이 고쳐지지 않는 한 경영의 투명성, 효율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2004년 10월12일)
“참여정부는 공기업 개혁의 수단으로 민영화 대신 혁신을 내세웠다. 그러나 경영 난맥상과 도덕적 해이는 혁신 구호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게만 느껴진다.”( 2005년 9월28일)
“공공기관이 임직원의 배를 불리고 자리 마련하라고 만들어진 곳은 아니다. 정부 당국자들의 무리한 자기 사람 앉히기 행태부터 차단해야 한다.”( 2005년 10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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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공기업들의 경영 상태가 ‘방만’을 넘어 ‘범죄’에 가까울 정도로 엉망인 것으로 나타났다.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중소기업은행 등 3대 국책은행장의 2004년도 평균 연봉은 6억3600만원, 한국은행 직원의 평균 연봉은 8218만원이었고, 산업은행·중소기업은행·수출입은행의 평균 연봉은 7717만원이었다. 특히 한국은행 등 4개 기관은 청원경찰 및 운전기사를 자체 직원으로 채용, 청원경찰(218명)의 평균 연봉은 6300만원, 운전기사(88명)의 평균 연봉은 6700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6년 9월27일)
“참여정부 출범 이후 정부 산하기관장들의 연봉이 대폭 늘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2002년에 비해 세 배가량 임금이 급등한 기관은 3곳에 달했고, 50%가량 넘게 상승한 기관도 총 21곳에 이르렀다.”( 2006년 9월29일)
“철밥통인데다 일이 편하고, 호주머니까지 두둑하니 소문 그대로 ‘신이 내린 직장’이다. 이런 상황은 공공연한 비밀이어서 공기업 직원 900명 뽑는 데 15만 명이 응시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다. …공기업이 세금으로 자기 배만 채운다니 국민은 허탈할 수밖에 없다. 그러는 사이 경영은 썩어 들어가고 있다. 지난해 공기업 다섯 곳 중 한 개꼴로 적자를 냈다. 순이익은 30% 줄고, 부채는 20조원 늘었다. 모두 국민 부담이다.”( 2007년 1월23일)
“한국 공기업의 총부채는 2005년 말 기준으로 122조원에 이른다. 그런데 공기업 사장 가운데는 7억1120만원의 연봉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4억8540만원의 연봉을 받는 감사가 있다. 정부 통계만 보더라도 공기업 직원은 대기업 평균 연봉의 최고 1.7배를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성과등급이 최하위인 11등급의 평가를 받은 직원에게 성과급을 330%나 지급하고 처 외조모상(喪)에까지 위로금 200만원을 지급하는 등 각종 명목의 복지후생비를 지급한다. 게다가 1년의 절반 가까운 140여 일의 공식 휴가에 더하여 성희롱 휴가, 입양휴가, 창립기념일 대체휴가 등 각종 이름의 목적휴가를 더 달라는 노조의 요구에 대해서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국민 혈세로 운영되는 빚덩어리 공기업에서 노사가 한통속이 되어 이와 같이 놀자판 잔치를 벌이는 모습은 파렴치와 다름없다.”( 2007년 1월24일)
“세금 12조원을 쏟아부어 관료들의 퇴임 자리나 만들어주는 우리 국민의 처지는 ‘낙하산 천국’ 일본의 기준에서도 너무 안쓰럽다. …그런데도 정부가 우물쭈물하다 ‘이제 확정됐다’며 자리를 터니 곧장 청소 분위기로 접어든다. 무서운 것은 이런 사회 분위기다. 언론이 뭐라 써도, 시민단체가 질타해도 전혀 통하지 않는, 상식과 염치의 진공(眞空) 상태를 말한다. 우리 사회는 어느덧 이렇게 변했다.”( 2007년 3월10일)
매년 몇 차례씩 이런 비판이 무더기로 쏟아진다. 홍수 사태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물론 과장된 비판도 있을 게다. 그런데 놀랍다 못해 어이없는 건 비판을 받은 쪽은 아무 말이 없다는 사실이다. 역대 정권들은 이런 비판에 늘 침묵으로 일관했다. 야당도 마찬가지였다. 의원들은 국정감사를 위해 공기업·공공기관의 문제점을 열심히 파헤치지만, 당 차원에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어떻게 바꾸겠다는 청사진은 내놓지 않는다.
왜 그럴까? 공기업·공공기관을 이른바 ‘줄 세우기 정치’를 위한 ‘인적 자원 관리소’로 이용하는 걸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기업·공공기관이 국정원을 능가하는 정권 안보 기구가 된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대안으로 제시되는 건 늘 ‘민영화’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과연 민영화가 최선의 답인가?
미친 척 모르쇠하더니 이번엔 반응하나
공기업·공공기관은 ‘시장’이 대중의 삶을 어디까지 지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공기업·공공기관이 성공하면 시장은 조절될 수 있는 반면, 실패하면 모든 걸 시장에 맡겨야 한다. 진짜 이데올로기 투쟁은 바로 이곳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공기업·공공기관이 개혁의 전진 기지가 되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 중요한 문제를 아무리 핏대 올려가며 역설해도 별 반응이 없다. 물론 일부 애국적 네티즌들의 분노는 늘 분출됐지만, 그 규모가 크지 않아 정권은 미친 척하면서 모르쇠로 일관하곤 했다. 왜 이번 사건처럼 거국적인 분노의 물결이 일어나지 않았던 걸까? 감정의 동요를 일으킬 만한 그림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이과수 혁신 세미나’는 꼭 이과수 그림이 아니라 하더라도 시각적으로 와 닿는다. 뜨거운 관심과 더불어 분노가 폭발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것이다. 그래서 그간 침묵으로 버티는 걸로도 모자라 오히려 ‘낙하산 인사’ 옹호론을 펴온 노무현 정권도 오랜만에 반응을 보이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내게 항의를 했던 분의 선의는 십분 이해한다. 공기업·공공기관 개혁이 말처럼 쉽지 않더라는 토로에도 공감한다. 그렇지만 이런 질문은 하고 싶다. 그간 엄청난 양의 ‘정치 담론’을 쏟아냈던 노무현 대통령이 단 한 번이라도 말로나마 이 분야의 개혁 압박을 가한 적이 있는가? 오히려 외부의 비판에 대해 옹호론을 펴는 데만 바쁘지 않았던가? 공기업·공공기관으로 진출한 수많은 노 정권 인사들 가운데 ‘억대 연봉’ ‘기사 딸린 고급 승용차’ ‘비서 딸린 넓은 집무실’ ‘아무리 긁어도 마르지 않는 판공비’ 등이 지나치다며 그 가운데 단 하나라도 부분적인 시정을 시도한 사람이 있는가? 노 정권이 한동안 외쳤던 ‘양극화 해소’는 오직 보수세력을 대상으로 한 정치공세일 뿐인가? 차라리 솔직하게 정치가 공기업·공공기관을 착취하지 않으면 정치를 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게 알맹이 있는 토론을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또 하나 묻고 싶은 건 그들 중에 언론의 공기업·공공기관 비판에 공개적으로 대응하거나 답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내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사례는 딱 하나뿐이었다. 지난 3월 농수산물유통공사 감사인 강동원은 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노무현 대통령 경선 조직팀에서 활동했던 그는 “나는 낙하산이 분명하다. 하지만 놀고먹으며 공기업을 말아먹는 무능한 감사가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다”며 공기업 내부의 잘못된 관행과 규정 위반을 비판했다. 이른바 ‘낙하산 감사’들이 했어야 할 일은 ‘이과수 혁신 세미나’가 아니라 바로 이런 작업이 아닐까?
앞서 말했듯이, 내가 더 큰 문제의식을 갖는 건 정치의 공기업·공공기관 착취가 궁극적으로 초래할 결과다. 시장만능주의에 반대할 게 분명한 사람들이 공기업·공공기관 비판의 불길에 오히려 기름을 퍼붓는 일을 함으로써 여론이 시장만능주의 지지로 돌아서게끔 하는 건 ‘국가적 범죄행위’라는 게 내 생각이다.
‘21명의 감사’ 향한 질타로 그쳐선 안돼
지금 우리는 ‘무엇’보다는 ‘어떻게’가 훨씬 더 중요해진 시대에 살고 있다. 영상에 중독된 일상을 살고 있는 대중에게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없으면 있어도 없는 게 되고, 보여줄 수 있으면 별것 아닌 것도 큰일이 된다. 우리가 주로 사소한 일에 분노하는 이유는 그것이 시각적으로 내 눈앞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여론민주주의 체제하의 계급투쟁은 주목투쟁이다. 누가 더 대중의 주목을 많이 뜨겁게 쟁취하느냐가 승패를 좌우한다. 정치인과 연예인만 주목투쟁을 하는 게 아니다. 주목을 받아야 취업도 하고 연애도 할 수 있다. 놀이인들 주목으로부터 초연할 순 없다. UCC를 보라. 모두 ‘날 좀 보소’를 애타게 외치고 있지 않은가.
‘이과수 혁신 세미나’와 관련된 도덕적 해이를 질타하려면 그 주요 대상이 21명의 감사여서는 안 된다. 유력 대선 후보들에 줄 선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공기업·공공기관의 한 자리라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공기업·공공기관을 정치적·정략적 도구로 계속 착취해도 되는지, 이게 주요 대선 이슈가 되어야 한다.
시각주의 인지법은 좋거나 나쁜 게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현실이다. 먹고살기 바쁜 대중이 시각 중심으로 세상을 보겠다는데 그걸 무슨 수로 말릴 것이며 그런 대중을 탓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에 대해 가장 고민해야 할 주체는 언론이다. 추상적 이슈들을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보도 기법을 고민해야 한다. 우연히 그림이 좋은 사건이 터져주기를 기다리지만 말고 스스로 그림을 생산해낼 수 있는 보도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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