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로 정부와 언론의 ‘프레임’을 뒤집다
▣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한국 지식인의 치명적인 문제는 치정주의다. 사회적 현안이나 갈등에 대해 자신의 소신에 따라 공정하거나 일관성 있는 논평가 노릇을 하기보다는 자신의 치정·이해 관계에 따라 평소 신념마저 조율하는 경향이 농후하다는 뜻이다. 물론 정 많고, 인간성 좋고, 의리가 강해 그러는 것이겠지만, 그게 지식인의 덕목이 아닌 건 분명하다.
치정주의와의 투쟁, 존경스럽다
노무현 정권과 치정·이해 관계로 얽히지만 않았더라면, 과거의 언행으로 보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결사 반대할 것이 분명한 지식인들이 입을 꽉 다물고 있다. 그러다 어금니 부서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다. 그런가 하면 어느 게 옳은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나자빠지는 이들도 있다. 평소엔 국가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전공과 거리가 먼 주제들에 대해서도 사회적 약자를 위해 큰 목소리를 내던 사람들이 말이다. 또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 가지(예컨대, 과거사 청산)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른바 ‘단일 이슈’ 중독자들은 한-미 FTA에 대해 아예 무관심한 만용마저 드러내고 있다.
지금 나는 한-미 FTA 지지가 잘못됐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한-미 FTA 지지자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내가 말하려는 건 자신이 어떤 세력·집단의 일원이라고 느끼는 지식인이 평소 소신을 그 세력·집단의 우두머리나 다수가 내린 결정에 조율하는 관행이 한국 지식인들에게 ‘법칙’으로까지 통용되는 현실이다.
새삼스럽게 그런 현실을 개탄할 생각은 없다. 그 ‘법칙’을 깬 어느 희귀한 지식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서론으로 이야기한 것뿐이다. 누군가?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 정태인이다. 다 알다시피, 그는 2006년 4월3일 와의 인터뷰에서 “한-미 FTA는 전형적인 한건주의며 임기 안에 무엇인가 업적을 남겨보려는 노무현 대통령의 조급증이 한 원인”이라고 했다. 이 발언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후 그는 본격적인 한-미 FTA 강연에 나섰다. 그는 그해 12월 어느 칼럼에서 “몇 번째인가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180번이 넘은 것은 확실하다”고 했는데, 이젠 수백번을 기록했을 것이다.
정태인,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존경스럽다. 그의 투쟁은 ‘치정주의와의 투쟁’이기도 하다. 한-미 FTA에 대해 잠자코만 있어도 노무현 정권에서 멋진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을텐데, 정태인은 굳이 그 험난한 고행을 자원하고 나섰다. 출세는 제쳐놓더라도, 자신과 더불어 열심히 일했던 과거의 동지들을 비판해야 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정태인을 존경하기 위해 꼭 한-미 FTA를 결사 반대할 필요는 없다. 한-미 FTA를 결사 찬성하는 사람일지라도 지식인의 치정주의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정태인에겐 그 점에 한해선 존경을 보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런데 이런 당연한 ‘분리주의’마저 잘 먹혀들지 않는 게 우리 현실이다. 그간 이른바 친노(親盧) 인사들의 치정주의를 가장 강하게 비판했던 게 누구였나? 보수신문들이었다. 따라서 보수 신문들은 정태인의 ‘한건주의’ 주장에 동의하진 않더라도 평소 자신들이 비판해온 친노 인사들의 행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 정태인의 ‘양심과 용기’를 일단 긍정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악담과 저주를 퍼부었다.
사실 보수 신문들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의 이념이나 정치적 성향이 문제가 아니다. 정신분열증이 문제의 핵심이다. 일관된 원칙이 전혀 없다. 한-미 FTA 협상 타결 이후, 보수 신문들이 격찬한 노무현의 ‘집념·뚝심·배짱’은 과거 자신들이 ‘아집·맹목·광신’이라고 저주를 퍼붓던 노무현의 일관된 특성이었다는 걸 모른다. 머리가 텅텅 빈 거다. 알고서도 그랬다면 더 나쁜 것이니, ‘텅 빈 머리’ 쪽을 택하는 게 더 나으리라.
노비어천가, 보수 신문의 정신분열
보수 신문들을 지배하는 건 이견을 전혀 허용치 않는 철저한 군사주의 문화다. 보수 신문의 모든 기자들이 한-미 FTA를 찬성한다 하더라도 각자 생각의 편차는 있을 게다. 그런데 그마저 드러나질 않는다. 모두 다 일사불란하게 ‘결사 지지’다. 처음부터 그랬나? 그것도 아니다.
2006년 4월12일치 사설은 “우리가 연간 교역 규모 35억달러인 칠레와 FTA 협상을 개시해 타결하는 데 3년1개월이 걸렸고 국회 비준을 거쳐 발효되기까지는 4년7개월이 소요됐다. 그런데 이 정부는 교역 규모 720억달러로 칠레의 20배가 넘는 미국과 1년1개월 만에 FTA 협상을 타결짓고 1년10개월 만에 발효하겠다는 것이다. 시간표 자체가 무리다”라며 “결국 대통령과 측근 몇 명끼리 귀엣말을 나누다 느닷없이 국민 앞에 들이밀었다는 말밖에 안 된다. 나랏일을 재미 삼아 하는 소일거리 정도로 알고 있다는 얘기다”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정태인의 ‘한건주의’ 발언 취지와 일치한다. 누가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설을 두고 내부 작전회의가 열렸을 법하다. 아마도 ‘무조건 결사 지지’라는 군사명령이 하달되었을 게다. 이걸 언론이라고 할 수 있나? 조금이나마 다른 목소리를 낸 건 과거 주필 김대중에게 엉길 정도로 배짱이 두둑한 논설실장 송희영의 칼럼이 유일했다.
송희영은 4월7일치 칼럼에서 “정부가 안 바뀌면 한-미 FTA 실패한다”고 했고, 4월21일치 칼럼에선 한-미 FTA로 인해 청년 실업자들이 ‘화염병 드는 날’을 예견했다. 두 칼럼의 내용은 모두 보수적 색채가 두드러지긴 하지만, 지금처럼 노무현식으로 한-미 FTA를 낙관하다간 큰 재앙이 닥친다는 걸 경고한 건 분명하다.
송희영의 칼럼을 제외하곤 보수 신문들은 광란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한-미 FTA 찬가와 더불어 ‘노비어천가’를 불러댔다. 다시 말하지만, 이념이나 정치적 성향이 문제가 아니다. 이들의 기본적인 정신 상태를 믿을 수 없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이 그들의 정신 상태를 문제 삼지 않고 있는 현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 편집장 정재권은 지난 4월17일치 ‘만리재에서’ 칼럼에서 “한-미 FTA 협상에 반대하는 진보 진영의 구호는 아직 뚜렷하지 않아 보입니다”라면서 “보수 진영과의 이 장기전에서 승리를 이끌어낼 프레임, ‘불패(不敗)의 언어’가 무엇인지 진보 진영은 고심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옳은 말씀이다. 정태인은 바로 그런 ‘프레임’의 문제를 꿰뚫어보고 있다. 정태인은 “요즘 유행하는 사극에 자극을 받았는지 정부는 장보고와 광개토대왕까지 한-미 FTA 찬성 광고에 등장시켰다”며 “마치 한-미 FTA가 미국 정벌의 장검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고 했다. 바로 이 말에 한-미 FTA가 일부 국민에게 먹혀들어 가는 이유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이 광고뿐만 아니라 노 정권과 보수 세력의 한-미 FTA 관련 담론은 모두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이게 한국인의 국가주의 정서를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숭미(崇美)주의와 공미(恐美)주의까지 가세하고 있다.
형식적 민주주의 유린한 방송 3사의 보도
진보 진영에 그런 ‘프레임’을 압도할 수 있는 다른 ‘프레임’이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그 이전에 더 큰 프레임에 혼선이 빚어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태인은 “노 대통령은 개방과 시장의 이름으로 박정희 시대를 새롭게 연다는 의미에서 한나라당 ‘비밀당원’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는데, 이 비판은 한-미 FTA 문제가 ‘보수 진영 대 진보 진영’의 구도만은 아니라는 걸 지적한 셈이다.
노 정권의 열성 지지자들은 여전히 노 정권을 지지하고 있고, 한-미 FTA는 그런 지지의 ‘끼워팔기’ 품목으로 전락했다. 그 열성 지지자들의 수가 적은 것도 아니다. 아직도 전 유권자의 10%가 넘는다. 이들은 자신이 여전히 개혁·진보 진영에 속한다고 믿고 있거니와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바, 개혁·진보 진영이 시도하려는 ‘프레임 전쟁’을 무력화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요컨대, 개혁·진보 진영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과 그의 지지자들로 인해 ‘불패의 언어’를 만들어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기가 막히게 좋은 ‘불패의 언어’를 만들어낸다 한들, 그건 보수 진영이 아니라 노무현과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먼저 격파 대상이 되는 게 현실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가장 큰 장애는 역시 방송이다. 한-미 FTA는 보수 세력과 노무현의 대연정인 동시에 보수 신문과 방송의 ‘언론 대연정’이기도 하다. 희대의 여론 조작이 가능했던 배경이기도 하다. 정태인은 “백번 만번 양보해서 어느 쪽이 진실일지는 반반의 가능성이라고 치자”며 노 정권의 여론 조작 시도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그들은 우리가 낸 세금으로, 적어도 우리의 절반이 반대하는 정책을 ‘네가 선택한 일’이라고 우격다짐한다. 그러나 그 나머지 절반의 가능성에 관해선 우리가 따로 돈을 내서 만들어도 방송조차 하지 못한다. 이건 공평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아주 초보적인 언론의 자유조차 억압하는 일이다. …한-미 FTA가 바야흐로 우리의 실질적 민주화, 즉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위협하리라고 얘기해왔지만, 한-미 FTA는 지난 30여 년간 애써 쌓아올린 형식적 민주주의마저 이미 짓밟고 있다.”
방송 3사의 한-미 FTA 관련 보도는 형식적 민주주의 유린의 대표적 사례였다. 언론개혁시민연대가 잘 지적했듯이, 방송은 △취재 없이 브리핑 전달로 일관 △우려의 목소리 ‘찬밥’ 취급 △오보 수준의 낙관적 전망 △‘소비자-생산자’식으로 국내 여론 편 가르기 △청와대 홍보매체로 전락 등 5가지 문제점을 드러냈다.
그런 작태를 보다 못한 정태인은 에 기고한 글에서 “MBC여, 차라리 침묵하라”고 호소했다. 그는 한-미 FTA가 타결된 뒤 문화방송의 보도는 “곧 ‘멋진 신세계’가 열릴 것이니 환호하라”고 시청자를 부추기는 ‘축제 분위기’였다며 다음과 같이 개탄했다.
“‘어떻게든 타결이 될 것이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예방주사를 놓기 바빴던 나도 TV를 보면서 망연자실, 맥이 풀릴 수밖에 없었다. 과연 MBC는 한-미 FTA 협상 타결의 결과가 ‘성공’이라고 생각하는가? 한-미 FTA로 한국 경제의 희망찬 미래가 열렸다고 확신하는가? ‘팩트’는 있는가?…근거도 없이 정부 지침에 따라 장밋빛 미래를 그리는 데 기꺼이 나서는 것은 나치 시대 괴벨스의 홍보기관과 무엇이 다른가? MBC여 차라리 침묵하라. 시사 프로그램을 오락 프로그램으로 모두 대체하라. 시청률 높아지고 광고 수입도 많아지니 그 아니 좋은가. 진정으로 당신들의 침묵을 원한다.”
노무현 정부의 거짓말을 폭로하다
그러나 방송엔 침묵의 권리마저 없다. 극소수 PD들의 ‘일탈’만 드물게 허용될 뿐, 높은 곳의 뜻에 충성하는 법칙은 건재하다. 보수 신문과 방송의 유착은 한국 사회의 시곗바늘을 김대중 집권 이전으로 되돌려놓고 있다. 이 막강 연합세력에 정부의 대규모 홍보 물량까지 가세하고 있다. 이들을 등 일부 신문과 일부 인터넷 언론, 그리고 정태인을 비롯해 이해영·우석훈 등 지식인들과 민주노동당 정치인들의 강연 행군으로 돌파하기엔 역부족이다.
이게 참 서글픈 사실이다. 장보고와 광개토대왕이 출정하는 그 자랑스럽다는 일을 왜 이런 식으로 해야 한단 말인가? 오죽하면 김근태·천정배·임종인 등 옛 여권 정치인들이 단식투쟁까지 해야 했을까? 그러나 보수 신문들은 이들의 단식투쟁에 조롱과 저주를 퍼부었다. ‘통상 독재’인 동시에 ‘언론 독재’다.
보수 신문들이 한-미 FTA에 미쳐 돌아가는 이유는 이것이 한나라당 정권하에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치정주의 문화 덕분에 여전히 개혁·진보 진영에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는 대통령이 한건주의로 일을 저지른 것이야말로 하늘이 준 기회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수 신문들도 그 기회를 이용해 똑같이 일을 저지르고 보자는 한건주의 심리에 사로잡혀 있는 셈이다.
한-미 FTA의 내용에 대한 분석 이전에 훨씬 더 중요한 게 ‘어떻게’다. 정태인은 자신이 2005년 당시 FTA 담당 비서관이었음을 밝히면서 노무현과 정부가 “2003년부터 한-미 FTA를 준비했다는 것은 내가 오늘 청문회에 나오기 위해 한글을 공부했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그들의 ‘거짓’을 실감나게 폭로했다. 이거 하나로도 충분하다. 거짓말을 해가면서까지 강압적으로 졸속 추진하는 한-미 FTA는 결사 찬성론자라도 반대하는 게 옳다. 정태인은 대연정 세력의 한건주의에 근거한 한-미 FTA 추진의 급소를 제대로 찔렀다. 문제는 ‘유통’이다. 거대 신문·방송 연합세력에 소수매체·강연·시위로 맞붙어야 하는 세상이 다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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