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은하 〈매거진t〉 편집장
잡지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가진 독자와 소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잡지쟁이를 박봉과 야근의 고통에서 이겨내게 하는 가장 강력한 진통제일 것이다. 하여 나의 가장 즐거운 일과는 바로 〈매거진t〉 기사에 달린 댓글 하나하나를 읽어 내려가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주, 그 즐거운 순간이 갑자기 악몽으로 변했다. 바로 〈매거진t〉의 외부 필진으로 〈W 코리아〉의 심정희 기자가 쓰고 있는 ‘스타일’이라는 칼럼에 달린 한 댓글 때문이었다. 독자 ‘river823’가 올려준 댓글은 감상이 아니라 제보였다.
“‘세상에는 넥타이 매듭에도 철학이 있고 브라운 윙팁 슈즈와 몽크 슈즈 사이에서 10분여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남자들도 있다지만(중략)’ 이 글은 미국에서 발매되는 (일주일에 한 번 나오는데 주로 에 끼워주더군요)의 한 꼭지로 패션에 관한 기사인데요. 첨 보고 놀라서 이렇게 회원가입까지 하고 몇 자 적습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심정희님이 쓰신 칼럼과 너무 비슷한 것 같아서요.” 〈매거진t〉는 황급히 해당 기사를 확인해보았고, 그 결과 언급된 기사는 어떤 구절의 ‘인용’ 수준이 아니라(인용이라면 출처를 밝히는 것이 맞다) 심정희 기자의 칼럼을 90% 이상 통으로 가져다 쓴, 글쓴이의 이름만 바꿔 단 ‘허락받지 않은 복사본’이었다.
허락받지 않은 복사본
의 이 사람(‘기자’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은 아마도 먼 미국 땅에서 누가 한국의 웹매거진에 실린 기사 따위를 읽었을까, 하는 마음으로 편하게 이 글을 베끼고 하루의 일과를 끝냈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차려라. 우리는 지금 2008년에 살고 있다. 21세기는 제주도의 한 소년이 뉴질랜드의 한 소녀가 키우는 코요테가 오늘은 얼마나 자랐는지를 매일 체크할 수 있는 위대한 웹의 시대다. 근엄한 대학교수님이 아프리카 오지에서 매춘을 한다 해도, 옆집 아줌마가 티티카카호수에서 노상 방뇨를 한다 해도 그것을 지켜보는 눈은 어디든지 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 학생이 졸고 있던 그 깊은 밤, 당신은 몰래 물건을 훔쳤다. 당신은 이따위 맥주 몇 캔이 대수냐며 즐겁게 취했을 것이다. 아니 심지어 “잘 사왔다”는 칭찬을 받으며 누구와 나누어 마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좀도둑질이건 나라를 팔아먹은 도둑질이건 그것은 분명히 죄다. 게다가 오늘날의 편의점에는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이라는 것이 있다.
2004년인가, 나와 성도 이름도 같은 광주의 한 소설가(내가 사랑하는 ‘꽃도둑’의 아티스트는 아니다)가 에 쓴 영화평을 그대로 베껴 한 매체에 연재하다가 사과한 일이 있었다. 또 당시 의 외부기고가가 다른 배우의 기사에 이름만 바꿔 쓰는 기가 막힌 경우도 있었다. 당시 나는 에 쓴 기고문을 통해 “진정 무서운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지적 소유물을 또 다시 도둑 맞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아니다. 도둑질을 하고도 그것이 범죄라고 생각 치 못하는 사람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그 어떤 호러무비보다 끔찍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쉬운 도둑질, 늘어난 증인들
물론 이후 세상은 그보다 더 무시무시해졌다. 한 선배의 글이 누군가의 블로그 포스트에 마치 그 사람의 글인 양 올라간 걸 목도한 적도 있고, 어떤 후배가 쓴 글이 사지가 찢긴 채 요지는 다르게 언급돼 있는 참혹한 현장을 보고 기가 막힌 적도 많았다. 그로부터 4년이 흘렀지만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여전히 모호하고 글을 베끼는 사람들의 도덕적 불감은 거의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급기야 도둑질은 점점 교묘해지거나 대범해져버렸다.
물론 하늘 아래 이미 새로운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의 취향을, 누군가의 말투를 따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행동방식을, 사랑법을 흉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의식적인 모방과 의식적 절도는 다른 문제다. 의 마지막 장면처럼 일생 동안 천천히 스며들어 그것이 모방인지도 모르는 동화의 단계나, 오마주라는 이름만을 내세운 게으른 창작은 비판받아야 하는 일이지만, 누군가의 글을, 창작물을 몰래 베끼는 행위는 도둑질이다. 21세기 웹의 발전이 당신의 글 도둑질을 더욱 수월하게 만들어준 만큼, 당신의 절도를 지켜본 증인들 또한 많아졌다. “이거 너무하지 않아?”라고 투덜대지 마라. 그 정도에 무슨 호들갑이냐고 코웃음 치지 마라. ‘ctrl A +ctrl C+ctrl V’ 이것은 단죄받아야 할 엄연한 범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