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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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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 지루하면 끝장이다

등록 2007-12-21 00:00 수정 2020-05-03 04:25

▣ 김창석 한겨레 교육서비스본부kimcs@hani.co.kr

사례 글 1. 외국의 도심 한복판에서 한국 모 대기업의 로고가 번쩍이는 전광판을 볼 때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이제 한국 유수의 재벌그룹들은 사기업의 의미를 넘어서 한국을 대표하는 하나의 심벌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의 재벌은 비단 국내 경제와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에서뿐만 아니라 국민 정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존재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단순히 재벌이 한국 사회에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행사하는 영향력이 크다는 이유로….

사례 글 2.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라는 옛 속담이 있다. 물론 집의 구조를 더욱 튼튼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집 자체를 없애버리는 결과를 낳는다면 빈대 잡는 일은 고려돼야 한다. 재벌 구조상 크고 작은 빈대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빈대를 잡기에 앞서 재벌이 올바른 방향이 아닌 집에 쓰러져버릴 수 있지는 않을까, 먼저 생각한 뒤 빈대를 잡아야 한다. 박정희 정권 이래 우리나라는….

사례 글 3. 이번에는 현대다. 삼성 일가의 전환사채 편법 증여와 두산그룹 형제의 비자금 조성에 이어 현대 부자의 경영권 편법 상속까지 덜미를 잡혔다. 국민들은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 몇십 년을 익숙하게 들어온 뉴스인 탓이다. 재벌기업의 문제가 떠오를 때마다 재벌 해체 목소리가 들려온다. 독점구조, 소유와 경영의 미분리 등….

글의 도입부는 글의 첫인상이다.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만난 지 몇 초 만에 결정된다는 책도 나온 적이 있다. 글에서 도입부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치도 이와 같다. ‘도입부가 곧 글의 전부다’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지만, 도입부가 글 전체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관건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도입부는 보통 짧은 게 좋다. 그렇지 않으면 지루해진다. 별다른 내용 없이 지루한 건 읽는 이에 대한 실례다. 좋은 글로 평가받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도 된다. 도입부가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는 이유는 보통 쓰려는 주제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려는 욕심 때문이다. 쓰려는 주제와 연관된 사회적 논의 과정이나 배경을 평범한 내용으로 늘어뜨리면 긴장감은 떨어지고 구조적 완성도에도 흠이 생긴다. 머리가 큰 사람을 ‘가분수’로 부르며 잘생기고 예쁜 사람의 범주에서 제외하는 것과 같다.

도입부를 쓸 때 또 하나 유의해야 할 점은 전개부(또는 ‘본론’)와의 연관성을 최대한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주장이나 견해를 밝히는 논리적인 글에는 주장하는 핵심 내용이 전개부에 담기게 되는데, 도입부는 핵심 내용에 접근하는 과정을 가장 매끄럽고 효과적으로 돕는 구실을 해야 한다. 읽는 이를 꼬드겨서 귀와 눈을 열게 하는 노릇을 못한다면 좋은 도입부가 아니다.

세 개의 사례 글은 ‘재벌 해체는 바람직한가’라는 논제로 쓴 논술의 도입부들이다. 현대그룹의 경영권 문제가 생겼을 때 쓴 것이다. 1번 글과 2번 글은 뻔한 내용을 지루하게 늘린 경우다. 상투적인 내용이 도입부에 나오면 읽기도 전에 김이 빠진다. 윌리엄 진서는 글쓰기의 고전인 에서 “나는 ‘아시다시피’라는 표현이 나오면 그 순간부터 그 글을 읽지 않는다”고 했다. 2번 글의 속담은 너무 진부하다. 그나마 3번 글이 상대적으로 낫다. 첫 문장도 짧고 주목도가 있다. 인상적인 맛은 떨어지지만 자신이 말하려는 내용에 연착륙할 수 있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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