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창석 한겨레 교육서비스본부kimcs@hani.co.kr
한 방송사에서 프로듀서로 일하는 대학 선배가 있다. 그는 그야말로 ‘메모광’이다. 어느 정도로 메모광인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지방 출신인 선배는 대학 때 자취 생활을 했다. 내 전셋집과는 무척 가까운 거리였다. 이웃사촌이었던 우리는 서로의 생활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선배는 아무리 피곤하거나, 술을 마셔도 그날에 겪었던 인상적인 일을 반드시 그날에 기록하곤 했다. 새벽 3~4시까지 술을 마신 뒤에라도 자취방에 들어가자마자 기록하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럴 때마다 “왜 그렇게 열심히 기록하느냐”고 묻곤 했다. 그는 별 대꾸 없이 대학노트(그 시절에는 그 노트가 왜 그렇게 두꺼워 보였는지!)를 펴놓고 만년필로 글을 끄적이는 것이었다. 한술 더 떠서 언론사 입사시험 준비를 할 때부터는 인상적으로 읽은 책의 내용이나 신문·잡지의 기사를 발췌해 예의 그 대학노트에 오려놓는 게 아닌가. 시쳇말로 ‘꼼꼼대마왕’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요즘도 그의 이런 기록 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그의 글솜씨는 일품인데, 내 생각에는 아마도 20년이 넘게 지속돼온 그의 메모 습관이 글솜씨를 이루는 근본 바탕이 아닌가 싶다.
독서는 글쓰기를 이루는 기본 질료다. 글솜씨의 전제 조건이 독서인 까닭이다. 책을 읽든, 신문·잡지를 읽든, 논문을 읽든지 간에 많이 읽는 사람이 쓰는 글은 뭐가 달라도 달라 보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독서도 효과적으로 해야 글쓰기에 직접적이고 실무적인 도움이 된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글을 읽다가 인상적인 내용이 나오면 바로 메모를 해두는 습관이다. 100을 읽고도 20~30만 써먹는 이가 있는가 하면, 100을 읽고도 120 이상을 활용하는 이가 있는데, 이들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는 ‘전략적 메모’를 하는지에 달려 있다.
전략적인 메모를 하면 글의 설계도를 쉽게 그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즉석 결혼식을 치른 가난한 연인의 동영상이 연극이라고 밝혀진 사건에 대한 글을 쓴다고 가정해보자. 그 사건을 접했을 때의 첫 느낌을 먼저 적는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로 그 사건을 접했더라도 당시의 느낌을 바로 적는 게 필요하다. 그 다음에는 좀더 정제된 자료, 즉 그 사건을 다루고 있는 신문기사나 잡지기사, 칼럼 등을 읽는 과정에서 인상적으로 보이는 내용을 따로 정리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이 사건이 시사하는 바, 즉 △블로그의 힘 △언론의 역할과 한계 △무엇이든지 과장하는 사회 분위기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글을 쓰기 직전에 그동안 써왔던 메모들을 모두 모은 뒤에 글의 설계도를 짠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글의 설계도에는 ‘생각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이 메모는 이 문단에 적합하다거나, 이 메모는 마지막 문단에 들어가야 효과가 극대화된다거나 하는 식의 계산이 가능해진다는 얘기다. 즉석에서 떠오른 아이디어에서 오는 생경함이 아니라, 여러 번 고민한 흔적이 농익은 데서 오는 깊이가 느껴지게 마련이다. 논리가 촘촘하면서도 설득력이 높은 글은 보통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기록하는 자가 역사의 주인이 된다’는 경구도 전해내려온다. 글쓰기 실력의 내공을 높이고 싶은 이들은 메모하는 버릇을 억지로라도 기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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